글. 김현식 감정평가사(대한감정평가법인 경인지사)
의사 면허의 취득 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낭독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선서는 해당 면허를 갖는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데에 이바지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선서’가 작금의 시기에 법에서 정한 윤리 규정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를 담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지난 2018년 3월부터
6월까지 수행했던 재개발 감정평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2018년 봄, 인천의 어느 주택 재개발 감정평가가 지자체 추천으로 의뢰되어 지장물 감정평가를 배정받게 되었다. 업무를 정식으로 착수하기 전에 조합이 주최하는 ‘사전
설명회’가 있다고 해서 참석했다. 6명의 담당 감정평가사와 조합관계자, 조합원들이 참석하여 준비된 식순에 따라 평이하게 진행되었으나, 문제는 개별 질의 응답시간이었다. 각종
첨예한 질문들, 예를 들면 “조합원 종전 자산가격의 수준은 얼마인가?”, “조합원 분담금은 어느 정도 예상되나?”, “일반 분양가는 얼마인가?”, “상가 임차인에 대한
보상평가는 얼마나 되나?” 등과 같이 감정평가 결과에 관한 질문들이 아직 업무에 착수도 하지 않은 감정평가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보다 적극적인 응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온 질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질문에 대신 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질의응답을 이어간 끝에 곳곳에서 큰 소리가 계속되던 설명회가 그나마
무난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수일 후, 조합에 모여 사전에 계획된 조사 일정에 따라 오전부터 각 주택을 방문하여 정식 현장조사를 시작하였다. 지장물 조사는 재개발 구역이므로 대부분 단독주택이고, 방문
시 소유자와 면담을 한 후 주택 내부와 옥상, 창고 등 현황을 조사하면서 소유자의 주장과 현황에 관한 판단 내용을 조사지에 기입하며 진행하게 된다. 지난 10여 년간 현장
조사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소유자들의 가장 사소한 이야기까지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감정평가와 무관한 이야기
일지라도 말이다. 통상 현장조사는 평일 아침부터 낮 사이에 이루어지므로, 주택에 들어가면 대부분 60대 이상의 어르신들만 계시는 경우가 많다. 그분들은 감정평가를 받는
소유자의 입장보다 집에 대한 애정과 인생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그런 이야기들이 본인 집의 가치를 더 높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르신의 기대를 반영한다는
것임을 잘 알기에, 그 어떤 인생 이야기라도 최대한 공감해서 듣게 된다. 이렇게 하다 보니 조합에서 계획한 일정보다 지체되었고, 첫날부터 주택당 10분을 기준으로 일정을
잡아놨지만 대기 중인 조합원들의 문의가 계속되어 조합관계자로부터 재촉을 받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나는 “현장조사 시에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은 각 조합원의 마음속에 감정평가사가 성실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은 물건이라도 꼼꼼히 조사해 준
것에 대한 기억을 남길 것이다. 그 기억은 감정평가 과정이 공정성과 전문성뿐만 아니라 진정성까지도 갖췄다는 인상을 남길 것이다.”라고 조합관계자를 설득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감정평가의 진정성까지도 조합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면 감정평가 결과가 통지되었을 때 감정평가사는 물론, 조합에 대한 민원을 상당히 낮춰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조사 일정이 수일이 더 걸려도 조사 과정에서의 성실한 자세가 더 중요함을 조합관계자에게 피력했다. 또한, 함께 현장에 임하는 타 법인 후배
감정평가사
에게도 양해를 구하고 다음 일정들을 다시 조정하게 되었다. 점심 이후부터 주택 한 호마다 최소 30분 단위로 일정을 잡았고, 조사 과정 중에 30분이 초과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다음 일정을 조정하면서 한 집마다 조사를 수행하였다.
어느 날 조사를 위해 방문했던 집의 80대 어르신께서 해주신 인생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을 탈출해서 부산에 내려온 후 인천에 정착하기까지의
그 험난했던 인생 이야기를 들었고, 말씀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다른 감정평가사와 조합관계자까지 함께 경청했다. 이처럼 실무적으로 감정평가를 수행하면서 소유자 및
이해관계인으로부터 감정평가와 무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 상황에서 감정평가사들은 때로는 곤란하고, 지루하고, 다음 일정에 차질을 빚기도 한다. 그 불편함을
모르지 않지만, 나의 현장조사 원칙은 그 부동산이해관계인의 모든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감정평가 결과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후 그 결과를 대하는 소유자
등의 태도에는 매우 큰 영향을 준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우리가 행하는 감정평가 업무는 그 감정평가와 관련된 이해관계자들의 첨예한 대립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서, 사업시행자와 피수용자 사이에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처럼 부동산을 두고 극단적으로 대립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감정평가가 이루어짐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임하는
것이 나의 현장조사 원칙이다.
첫날은 계획된 일정의 반 정도를 수행하고, 조합에 요청하여 이후 일정을 더욱 여유 있게 조정하였다. 이에 다음날에는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여유 있게 경청하면서
현장조사를 수행할 수 있었다. 3일 차에는 오전 조합사무실에서 현장조사 업무 준비를 하는 중에 조합장님이 면담을 요청하셨다.
조합장님은 지난 2일 동안의 조사를 받은 조합원들은 물론, 대기 중인 조합원들도 조사 감정평가사들에 대해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며, 지금처럼 잘 수행해 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해온 일들이 조합원을 거치고 조합을 지나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2018년 봄, 재개발 감정평가 당시에는 부동산시장의 온기가 거의 없었고, 인천 전 지역에서 사업이 멈춰있는 조합들은 늘어나는 비용과 불확실한 사업성으로 인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대상 구역 또한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이 분위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합원이지만 사업 자체를 지속해서 반대해 온 대책위원회가 여럿
있었고, 그중 대책위원장님의 주택 현장조사가 이루어지는 날이 왔다.
조합에서도 혹시나 좋지 않은 말을 들을 수 있으므로 각오해달라는 설명도 들었던 상태였다. 주택에 방문하여 만나본 위원장님은 자택에서 공부방을 운영하시는 40대 주부셨고,
그동안 조합과의 소통이 어려웠던 부분과 인천 내 아파트 공급과잉에 따른 재개발 후 가치 하락이 염려되는 점, 단독주택에서 계속 거주를 원하는 등 다양한 반대 근거를
말씀하셨다. 이에 감정평가사로서 인천 아파트 시장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요인들에 대한 객관적 사견과 함께 조합원들이 사업의 진행 과정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아픔에 대하여
공감하면서 조사를 마쳤다. 이후에도 위원장님과 유선으로 의견을 나누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첨언이지만, 대상 사업장은 올해 입주를 앞두고 있으며, 지난 3년간 아파트 가격 상승 영향으로 재개발사업의 사업성이 향상되어 결과적으로 조합원들의 이익이 크게 실현된
상황으로 알고 있다. 아파트 시장에 대한 예측은 어렵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조합설립·건축인허가·설계 등과 진행 중인 감정평가를 기초로 관리처분 총회까지 앞두고 있다면
“이미 출항한 재개발이라는 큰 배를 대양에서 다시 돌리는 것보다는, 힘을 모아 목적지인 입주라는 항구까지 배를 나아가게 해야 한다.”며 부정하고 반대하는 조합원들에게 최선을
다해 설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나의 원칙을 기반으로 감정평가 업무는 잘 마쳤으며, 이후에도 조합장님과는 민원에 대한 대응 등을 조언하는 관계가 되었다. 함께 했던
후배 감정평가사에게는 “이번 평가를 통해서 진정성 있는 현장조사의 중요성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재개발 감정평가에서 경험했던 일들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감정평가사가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유사한 노력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들의 진정성 있는 업무태도가 많은
선례를 만들 것이다. 국민에게 높은 신뢰를 받는 전문가로 인식되기 위해서 서두에서 언급했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의사에게 부여하는 것처럼 감정평가사에게도 그와 같은 ‘큰
의미’를 부여하는 제도가 마련되고, 그에 상응하는 감정평가사들의 노력이 지속해서 행해진다면 사회적으로 보다 높은 신뢰와 존경을 받는 전문직업인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