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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 교양
에세이

내 사랑 오월

글. 신수정 기자(이데일리 건설부동산부)

이런 게 사랑일까요

“그 고양이 엄마 줘라”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엄마가 내가 기르는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나섰다. 엄마는 내가 고양이를 키우기 때문에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고양이가 곁에 없어야 순탄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나의 연애는 언제부턴가 금방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처음엔 그냥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며 다른 사람으로 지워냈다. 하지만 그다음 사람도 또 다른 사람도 금방 헤어졌다.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명백한 사건이 생겼다. 하지만 사례가 늘어날수록 ‘문제는 사실 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은 어찌나 나를 실망케 하는지 자꾸만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했다. 헤어진 연인에게 비친 나는 밝게 빛났지만, 도무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부지 소녀였다.

한 번은 아빠가 나서서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아빠 지인의 조카가 서울에 사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담대한 긍정론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나는 그 제의를 덥석 받았다.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물었다. 잘생겼냐고.

전화번호를 넘겨받았는지 연락이 왔다. 간단한 자기소개 끝에 만날 날짜를 정했다.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진 사이에 여러 번의 양가 부모님들의 전화가 끼어들었다. 사실, 말이 소개팅이지 선이나 다름없었다. 양가 부모님은 과년한 딸과 아들의 연애가 잘되길 바랐다.

그도 고양이를 키웠고 내 직업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터라 그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외모도 내 취향이었다. 가끔 보였던 무신경한 행동은 약간의 호기심과 의문을 남겼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시동을 걸면 그대로 결혼으로 골인할 것만 같은 기세에 당사자들은 노를 놓아버렸다. 사실 나는 우선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나이가 4살이나 많았던 서른 중반의 그는 몹시도 부담스러웠는지 지지부진한 연락과 만남을 진전시킬 기미가 없었다.

먼저 포기를 외친 것은 나였다. 나쁘지 않았던 데이트였지만 마음을 터놓지 않는 그의 태도가 나를 실망케 했다. 여름휴가를 기점으로 그와의 연락을 끊었다. 명쾌하게 ‘그만 만나자’라고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찝찝했다. 그러나 우린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고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기에 이별을 고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여름휴가가 끝난 뒤 두 번의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할 이야기도 없었고 더는 답답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도망친 것은 그가 아니라 어쩌면 금방 결혼을 밀어붙일 것만 같은 부모님이었나 싶다.

신기하게도 어딘가에 존재했는지도 몰랐을 남자들을 자꾸만 알게 됐다. 소개팅이나 우연한 만남 속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몇몇은 내 옆을 지켰지만 잠시뿐이었다.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에 자꾸만 지쳐갔다.

나에 대한 확신을 지킬 수 있게 한 건 내 고양이였다. 엄마의 우려와는 반대로,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안의 사랑을 확인해줬다. 나 이외의 생명에게 헌신할 수 있고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줬고 함께 있는 것에 대한 기쁨과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줬다. 내가 또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 준 건 말 없는 내 고양이라는 사실을 엄마는 모르겠지. 2018년 2월 28일생. 브리티쉬 숏헤어. 회색과 노란색, 흰색 털을 가진 과묵한 고양이. 봄과 여름의 중간에 나에게 온 나의 오월.

코로나 블루

코로나가 유행한 지 벌써 2년이 다 돼간다. 우리 집 고양이 오월이는 그 기간이 그리 힘들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매일 밖으로 나가던 집사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덜 심심하지 않았을까? 재택근무를 하는 집사를 가진 고양이에겐 ‘코로나 블루’란 없다.

재택근무가 이어지다 보니 샤워하는 동안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오월이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자기 생각보다 화장실에 오래 머무르면 “야옹” 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긁던 오월이었는데 이제는 기다리지 않는다. 침대 위에서 뒹굴며 잠을 자거나 자기 할 일을 한다. 매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이던 나였는데, 막상 이렇게 무관심 속에 방치되니 왠지 모를 섭섭함이 든다.

그래도 여전히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여전히 문 앞에 앉아 나를 반긴다. 계단으로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반갑게 맞이할 준비를 해주니, 늘 감동이다. 아저씨들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나도 알 것 같다.

본가에 있을 땐 외출을 하거나 돌아왔을 때 의무적으로 인사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잘 다녀와~ 일찍 와~”, “응~ 어서 와” 하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크게 감동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당연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을까.

나를 반기는 오월이에게 나도 진심으로 인사한다. 오월아, 잘 지냈어? 뭐 하고 있었어? 밥은 먹었어? 재미있었어? 그런데도 오월이를 쓰다듬지 않는다. 집안에서 사는 오월이에게 바깥 병균을 묻힐까 봐서다.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자다가 눌린 얼굴 그대로 마중 나오는 오월이를 보고 귀여움을 참지 못해 쓰다듬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절대 불가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코로나다. 동물도 코로나에 감염될 수 있다는데, 내가 오월일 감염시킬까 봐 극도로 조심한다. 이 때문에 온 마음 가득히 번진 반가움을 손 씻는 30초 동안 흘려보내야 한다. 그동안 오월이는 일방적으로 내 다리에 비비적비비적한다. 나는 목소리로만 “아이고 우리 오월이 잘 있었어~? 잠시만~” 하고선 후다닥 손을 씻으러 간다. 손을 씻고 나서 다시 오월이를 찾아가지만 오월이의 반가움은 지나가 버린 상태다. 도도한 오월이는 막 잠에서 깼을 때와 바깥나들이 후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 제일 반겨준다. 그런데 코로나가 가장 중요한 황금 시간을 방해한다. 이건 분명히 우울하다. 코로나 블루다.

가족이 늘어났어요

내가 결혼을 하면서 가족이 부쩍 늘어났다. 오월이에겐 또 다른 집사 한 명과 말 안 듣는 동생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도도한 고양이가 변한 건 아마 그들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안락의자에 앉아 쉬고 있으면 먼저 달려와 안기는 모습은 나와 둘이 살던 2년 동안은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안으면 10초 만에 도망가버리는 녀석이었는데, 내 무릎에 눌러앉아 잠을 자려는 행동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월이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강아지 동생인 준이의 ‘질투’ 때문이다. 준이는 나에 대한 독점력이 강한 편이다. 새끼 때 데려온 탓에 나를 엄마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다가 오월이가 내 곁에 오기라도 하면 다가오지 못하게 오월이를 쫓아버린다.

오월이와 나의 거리 두기 기간이 길어지자 오월이는 적극적으로 애교를 피우는 횟수가 늘어났다. 일하려고 책상에 앉아있으면 방해꾼인 준이를 피해 책상으로 훌쩍 뛰어 올라와 머리를 쓰다듬으라며 들이밀었다. 안락의자에 앉아있으면 의자 위로 뛰어 올라와 내 무릎에 앉아 잠을 자기도 했다. 준이를 빠르게 따돌리며 내 곁을 맴돌기도 했다. 나는 오월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 정성껏 쓰다듬는다. 그러게, 오월아, 사랑만 듬뿍 받을 땐 몰랐지?

오월이의 또 다른 변화는 ‘활동성’이다. 오월이는 고양이답게 하루 대부분을 잠을 자며 보낸다. 새끼 때는 모든 것들에 흥미를 보이다가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세 살 아가씨가 된 오월이는 이젠 웬만한 것에 놀라지 않는다. 창밖을 보다가 잠을 자고 캣휠을 돌리다가 캣타워에 올라가 잠을 잔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거실 보조 소파 위다. 한낮이 되면 거실 소파 위로 일광욕에 나서는데, 거의 오후 내내 이 위를 떠나지 않았다. 하루 중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때는 장난감 낚싯대로 잡기 놀이를 하는 때다. 하지만 이리저리 뛰어놀다가도 쉽게 잡혀줄 것 같지 않으면 금세 뱃살을 드러내며 자리에 드러누워 버린다.

오월이의 다이어트를 성공시킨 것이 준이다. 준이는 오월이를 늘 따라다니며 귀찮게 군다. 이렇다 보니 준이가 귀찮은 오월이는 준이를 피하기 위해 땅을 밟을 땐 뛰어다니거나 높은 곳으로 점프를 해 움직인다. 심심할 땐 준이와 잡기 놀이를 하며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기도 한다. 오월이도 네발로 걷고 몸으로 놀 수 있는 존재의 등장이 내심 반가운 눈치다. 집사가 채워주지 못한 즐거움을 동생이 채워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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