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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A 인사이드
제1회 감정평가사 수기 공모전 우수상 作

선생님의 노후자금

글. 황순창 감정평가사(경부감정평가사사무소)

50년 전 일이다.

중학교 2학년을 시작하는 이른 봄날에 여자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으로 오셨다.

봄날의 아른하고 향긋한 추억 같은 것…

선생님께서는 종례 때가 되면 으레 “순창이는 남아서 선생님 좀 도와주고 가라.”라고 하여 선생님의 업무를 도와드렸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짜장면을 사주셨다.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갈 때는 선생님과 헤어지고 상실감이 상당하였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다섯 번이나 지나는 동안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버님의 중풍으로 가세가 기울고, 사춘기 시절의 몰아치는 방황, 염세주의 철학, 통제할 수 없는 신경쇠약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맛보았다.

그러면서도 질곡의 강 너머 아름다운 세상이 나를 키우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바람이 부는 벌판, 맑은 물소리, 눈부신 햇빛, 매일매일 해가 뜨고 지는 일, 계절이 바뀌는 모습 등 주위 모든 일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이 새롭고 절실하게 다가왔다. 가슴 저미는 감성을 달래며 살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바람이 불어 마음 설레는 걸 느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그리움이나 외로움에 내 몸 전부를 맡길 수 없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

1년 전의 일이다.

코로나가 시작될 즈음이다.

서소문로에 있는 K 감정평가사사무소의 최 소장을 만나고 나서 근처의 모교를 찾게 되었다.

왜소한 계단과 운동장을 보니 빛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다시 보는 듯 서글퍼졌다.

퍼뜩, 무언가가 나를 위로하듯 이○○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 선생님’ ‘○○중학교’ 안부를 여쭙지 못한 50년 넘는 시간이 밀려오는 듯 주체를 하지 못했다.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이○○ 선생님이시죠? ○○중학교에 계셨던..?”

“예, 누구시죠?”

“선생님, 저 순창이입니다. 황순창”

“어! 이게 누구야?”

기억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선생님께서는 반색하면서 나를 반기셨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 보자고 연락을 주셔서 꽃을 들고 선생님의 오피스텔을 방문하였다. 유학파 심리학 박사인 선생님의 둘째 아드님도 동석했다. 선생님의 둘째 아드님이 어머님의 앞길을 살피고 모시는 모습이 잔잔하면서도 오래 남는다.

선생님께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서류를 몇 장 주시면서 어렵게 고민거리를 꺼내기 시작하셨다. 선생님은 지인의 소개로 S 사장에게 4억 원 정도 투자를 하였는데, 그중 1억 원은 돌려받았으나, 추가 4억 원을 투자 요청받은 상황이라고 하셨다. 투자 이익금 50%와 추가 투자의 위험 사이에서 고민하시는 모습이었고, 둘째 아드님은 어머님을 말리고 싶은 눈치였다. 적지 않은 금전을 운용하는 일이다 보니 고민이 많으신 듯하여 선생님을 도와드리기로 했다. 선생님께서는 S 사장과 삼자대면 형식으로 만나주길 바라셨고, 우리는 곧장 날짜를 잡았다.

서초동에 있는 나의 사무실로 모이기로 한 날이 다가오자 나는 밤늦게까지 본건 전례와 실거래가격, 등기부등본, 인근 감정 전례, 주변 로드 뷰, 위성사진까지 확인하였다. S 사장은 애초 투자 대상인 6필지의 토지를 매도하였으며 과도한 근저당을 설정하여 빈껍데기 토지인데도 불구하고 추가 투자를 유도하였다.

“사람들이 줄 서서 사려고 해요. 개발하면 평당 60~70만 원인데 지금도 5, 6명 정도가 매수 의사를 보이고 있어요.”

어쩐지 선생님을 상대로 사기 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조사해 보니까 본건 6필지 중 절반 이상의 면적이 개발이 안 되는 농림지역인데 농림지역은 평당(3.3제곱미터당) 5만 원에 불과 하군요.” 하였다.

S 사장은 “그 값이면 제가 지금 살게요. 어느 땅이죠?” 자신감을 내비치며 투자 분위기를 유도하려고 애썼다.

내가 다시 “사지 마세요. 개발도 안 되는 땅일 경우 되팔기도 힘듭니다.”라고 했더니 S 사장은 “그 땅 좋은 거는 알고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가 진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한 로드 뷰, 위성사진과 함께 똑같은 용도지역이면서 평평하게 다듬은 바로 옆 토지(000-18)의 경매 감정평가서와 실거래가 자료를 보여 주었다.

그는 전문가가 근거 있는 자료를 제시하자 불리함을 느꼈는지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지며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다. 본건 토지(000-11) 바로 옆의 000-18 토지의 법원 경매 감정평가 단가는 제곱미터 당 13,000원에 불과하다.

제자와 S 사장이 주고받는 대화로 선생님께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시게 되었고, 선생님께서는 그에게 투자한 돈을 돌려달라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선생님의 투자금을 돌려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선생님의 추가 투자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난 후에 애초에 투자한 금액을 되돌려 받지 못할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자료도 많이 뽑고 애 많이 썼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하셨다. 나는 양 손사래를 치면서 “아휴, 선생님. 이런 일이라면 언제라도 제가 기꺼이 도와드려야죠.”라고 말씀드렸다.

짧은 시간에 활용한 한국감정평가사협회의 평가 전례(KAPA HUB), 실거래가 정보는 모두에게 유용하였다*.

* 토지의 특성 분석, 권리 분석, 가격수준, 개발 가능성 등에 대한 정보제공으로써 의견표시에 그친 것으로 관련 자료는 황순창 감정평가사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해당 자료는 보여 주는 데 그쳤으며, 정보의 외부 유출은 없었음을 참고 바랍니다.

선생님께서는 제자와 S 사장이 대면한 후, 감정평가사로서 활약하는 제자의 모습에 상당히 흡족해하셨다. 내가 난이도가 높은 소송감정평가업무를 수행할 때면 캐리어에 서류를 넣어 다니며 휴일 없이 업무를 한다고 말씀을 드리니, 선생님은 “코로나 시국에 일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단하다.”고 말씀하셨다.

감정평가사는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외부로부터 도전받는 경우도 많다.

특히 소송감정평가업무나 특수감정평가업무의 경우 그 강도가 높다. 법원의 소송감정인으로 지정되면 잘못 작성된 감정서를 바로 잡는 재감정평가업무를 의뢰받기도 한다. 일례로, 법원 소송의 1차 감정이 잘못되어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 진실이 밝혀지면 불리해지는 당사자가 볼펜을 뺏어가거나 육두문자 공격을 하는 등 거친 행동을 보일 때가 있어 혼이 빠져본 적도 있다.

나날이 사회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므로 소송이나 다툼이 많아지고 있다. 사회의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감정평가사는 전문성 함양, 공정성과 직업윤리 증대 등 큰 책무를 요구받게 될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세상을 상상한다.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 향긋하고 서늘한 바람, 거리는 활기차고, 사람들 모임은 축제 같기도 하고 사는 것 같은 생활…

코로나가 있는 세상에서는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인생을 주변에서 느끼게 되길 기대한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는 모든 일이 또다시 경이로울 것이다.

선생님이 저술하신 책말미에 선생님의 둘째 아드님이 어머니에 대해 쓴 어린 시절의 수기가 있다. 거기에 선생님께서 아들을 ‘믿어주셨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선생님께서는 감정평가사인 제자가 보여드린 정보를 신뢰하시고 크게 기뻐하셨다. 학교 선생님으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까지 하셨다. 신뢰받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여든이 가까우신 선생님의 편안하신 노후와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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