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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 워킹맘 생존 비법

글. 권한울 기자(매일경제신문 부동산부)

“자녀 유치원 학예회와 중요한 회사 미팅이 같은 날 잡혔습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공공기관 여성 관리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워크숍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내면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과정에서 짓는 표정을 사진에 담는 프로그램이었다. 질문을 받은 한 관리자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미팅에 가겠다”고 답했다. 학예회에 참석할 가족을 미리 섭외해 놓은 후 회사 미팅에 참석하겠다는 것이다. 난처해하거나 고민하는 기색은 없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유치원 행사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점에서 ‘나는 여성 관리자가 되기에 멀었나’ 싶다가도, 결국 미팅을 선택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워킹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큰아이 유치원 입학식을 뒤로하고 해외 출장을 떠난 전적이 있다.

지방에 있는 근무지와 서울의 집을 오가며 아이를 키워낸 여성 관리자, 워크숍 일정이 끝나는 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관리자 등 모두가 영웅처럼 느껴졌다. 한 조직에서 수십 년 근무하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고, 끝내 첫 여성 관리자가 된 것이 대단한 일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여성이 관리자가 되는 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만큼 희소한 일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루 중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같은 팀 과장”이라고 답하는 모습에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 역시 하루에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직장 상사다. 정작 내 아이들과는 퇴근해서 잠들기 전까지 고작 두세 시간 이야기하는 게 전부다. 직장 상사와는 하루 종일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모자라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한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애 키우랴, 직장 생활하랴, 얼마나 힘드셨나요?” 한 여성 관리자가 답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악바리 아닌 사람 없을걸요.” 이 악물고 버텨야 여기까지 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녀가 성인이 돼 이제는 더 이상 책임질 게 없다는 그는 장장 20년에 걸친 양육에서 해방된 듯 홀가분해 보였다.

여성 경제인들을 만나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워킹맘으로 사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내가 워킹맘이기도 하거니와 상대방 역시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워킹맘으로 살아남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워킹맘은 초 단위로 살지 않으면 안 돼요.” 취재차 만난 한 중소기업 대표는 워킹맘으로 사는 비결을 묻자 이같이 답했다. 시간을 쪼개 쓰지 않으면 여성이, 엄마가 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가정주부로 살다가 아이들이 고등학생일 때 창업했다. 가사와 사업을 병행하려면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또 가정이 편해야 바깥일도 잘 이뤄진다는 생각에 지금도 매일 퇴근 후 집에서 밥을 지어 가족들과 식사한다고 했다.

한 중견기업 부장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돈으로 해결하라고 했다. 아이들 얼굴 볼 시간도 부족한데 퇴근하고 집에 가서 집안일만 하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의류건조기 등 기계로 해결할 수 있는 건 기계로 해결하고 그 시간에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놀아주라고 했다. 퇴근하자마자 아이들과 놀아주기는커녕 설거지에 빨래에 밀린 집안일만 하면 하루 종일 부모만 기다린 아이들이 너무 속상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 등 가족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양육할 때는 육아나 교육 방식을 전적으로 조력자에게 일임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한 공공기관 팀장은 ‘직주근접’을 강조했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시간을 줄여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라는 것이다. 실제 그는 회사에서 도보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산다. 아이가 근처 학교에 다니다 보니 갑자기 아프거나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점심시간에 짬을 내 급히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한 홍보대행사 임원은 주말마다 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고 했다. 평일에 아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쓰는 만큼 주말에 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같이 어울릴 시간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아이들만 초대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들도 함께 초대한다. 엄마들 역시 누군가에게 초대받고 싶지만 정작 그럴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음식 장만에 청소까지 번거롭지만, 워킹맘은 자녀를 위해 ‘돈과 시간을 더 많이 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 명의 자녀를 둔 다른 중소기업 대표는 워킹맘 생존 비법으로 ‘내려놓기’를 꼽았다. 일은 일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학업은 학업대로 해내려니 어느 순간 우울증이 찾아왔고 병원의 도움을 받아 회복하는 과정에서 ‘내려놓기’를 배웠다고 했다. 그는 조력자를 총동원했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놨다. 일하는 엄마가 아이들 아침을 잘 먹여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상황에 의연해지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옭아매지 말라고 조언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학부모들과의 관계에서 합리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고 조언한다. 때론 부당해 보이거나 불필요해 보이는 일들도 아이를 위해 기꺼이 함께하라는 것이다. 매사 합리성과 효율성을 따지는 회사 업무와 달리, 학부모 모임에서는 때론 합리적이지 않거나 내 아이에게는 불필요한 활동이 수반될 수 있는데 이때 옳고 그름을 따지다 보면 괜한 반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워킹맘으로 사는 법을 묻는다면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코로나 무서운데 엄마가 맨날 나더러 유치원 가라고 하잖아.” 큰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울 때, “엄마 오늘은 회사 안 가면 안 돼?” 작은 아이가 출근하는 나를 붙잡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수백 번 사표를 썼다. 코로나가 아니어도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해 가슴 한구석에 돌덩이를 지고 사는 워킹맘인데, 코로나19 확산으로 가정 보육해야 하는 날이 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일을 계속하는 게 맞나’ 고민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일을 하나,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남편의 말을 곱씹는다. 아이들이 엄마를 필요로 하는 순간은 어렸을 때 잠깐일 뿐, 엄마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남편의 말을 말이다. 아이들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아이들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남편은 말한다.

그렇다. 아이들이 자라서 엄마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포기한 내 인생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듯한 허무함을 견뎌야 할 텐데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누구 엄마가 아닌 내 이름 석 자로 나를 소개하며 내 일을 하는 게 좋다. 그러려면 매일같이 엄습하는 죄책감을 벗어던지고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워킹맘들은 저마다 생존 비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교훈일 테다. 하지만 육아 선배랍시고 묻지도 않은 후배들에게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로 훈수를 두는 게 회사 생활에서만 금기시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넌 왜 안 하냐, 그러면 뒤처진다 등 섣부른 조언은 하지 말자. 집마다 가치관과 경제 여건이 달라 괜한 조언은 상처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키우면서 그 정도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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