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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다른 일’이있나요?

글. 이동희 기자(뉴스1 건설부동산부)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으니 조심하게.” In Search of Captain Zero의 저자 앨런 C. 위즈베커

무슨 이야기인가 싶습니다. 무엇이 왜 달라진다는 것인지. 위의 문구를 보고 혹시 아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서핑 이야기입니다.

서핑을 간단히 말하면 서프보드를 이용해 밀려오는 파도를 타는 스포츠입니다. 많은 분이 키아누 리브스와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영화 ‘폭풍 속으로(1991)’를 떠올릴 것입니다. 미국의 록 밴드 비치보이스의 노래 ‘Surfin USA’가 떠오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서핑을 미국 캘리포니아와 하와이 등 일부 지역에서만 하는 스포츠쯤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요즘 국내에서 가장 핫한 여름 스포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4년 4만 명에 불과했던 국내 서핑 인구는 최근 20만 명을 훌쩍 넘었고, 서핑 강습소도 2014년 50여 개에서 현재 400여 개 수준까지 늘었습니다.

파도를 타는 서핑은 매우 힘든 스포츠입니다. 그럼에도 왜 많은 사람이 서핑을 할까요.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공통점은 바로 즐겁기 때문이 아닐까요.

서핑을 처음 경험했던 때를 잊지 못합니다. 2018년이니까 비교적 늦게 입문했습니다. 햇수로 3년째지만 여전히 초보 티가 팍팍 납니다. 저는 있는 시간 없는 시간을 쪼개서 당일치기로 양양 등 동해로 향합니다. 엄청나게 자주 가는 것처럼 들리시겠지만 1년에 서핑을 위해 바다로 가는 횟수는 10번이 채 안 됩니다. 서퍼들 사이에서 “물밥을 먹는 만큼 실력이 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제 실력은 항상 제자리입니다. 최근에는 아내의 출산으로 더 물밥 먹을 일이 적어졌습니다.

초보인 네가 무엇을 안다고 서핑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롱보드로 노즈라이딩을 하거나, 숏보드를 타고 튜브라이딩 정도 해야 서핑의 즐거움을 얘기할 수 있지, 패들 아웃 해 라인업까지도 힘겹게 나가고, 파도도 제대로 못 잡는 제가 서핑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게 참 부끄럽습니다.

  • 노즈라이딩이니 패들 아웃, 라인업
    이런 용어가 궁금하시면
    인터넷에서 서핑을 검색해 보세요.
    유튜브에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영상들이 많습니다.

서핑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서프보드를 들고 바다에 들어가 패들링을 해 라인업을 합니다. 라인업에서 보드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어떤 파도를 잡을지 살핍니다. 좋은 파도가 오면 서프보드를 해안가로 재빨리 돌려 패들을 합니다. 그리고 파도를 잡고 일어서서 라이딩을 합니다.

글로 쓰니 생각보다 어렵게 보이지 않네요. 하지만 실제로 해보시면 압니다. 파도를 넘어 라인업까지 가는 패들 아웃부터 쉽지 않습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소금기 가득한 물이 입에 잔뜩 들어가고 바닷물에서 허우적거리기 일쑤입니다. 이게 반복되면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서핑이 즐거운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좋습니다. 라인업에서 파도를 운 좋게 잡아 엉거주춤 테이크오프 해 직진이든 좌우든 라이딩을 하는 그 즐거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신나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은데 분명 그 이상이 있습니다.

제게 그 이상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라이딩이 서핑의 큰 즐거움이지만, 기다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라인업에서 보드에 앉아 좋은 파도를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머릿속이 정돈됩니다. 오롯이 밀려오는 파도에만 집중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은 파도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보드에 앉아 멍하게 둥실둥실 떠있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여기서 비까지 내려주면 금상첨화입니다. 2018년 8월 그때 양양을 가지 않았더라면, 해변에서 캠핑만 하고 서핑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30대 중·후반에 그 어떤 취미가 내게 이렇게 큰 행복을 선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선뜻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저의 서핑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서핑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는 글도 아닙니다. 직업이 아닌 ‘다른 일’이 주는 즐거움은 대단합니다. 불안감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데 원동력이 됩니다. 서핑은 바로 인생의 불안감에서 벗어나 제 삶을 더 풍요롭게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아널드 베넷이 쓴 ‘How to live on 24 hours a day’라는 책이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침 5분, 차 한잔의 기적’(2009)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 저자는 직장인에게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뭐 뻔한 얘기 같지만, 이 책이 쓰인 시점이 1910년이라는 점에서 조금 달리 보입니다.

베넷은 샐러리맨은 억눌린 불만족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고, 직업 외에 뭔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불만족이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책에서 “자신과 가족을 건강하고 무탈하게 부양할 의무가 있다. 빚을 갚아야 하고, 저축해야 하며, 자신의 업무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잘 먹고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려운 과업이다. 그러나 주어진 책무를 완수하는 것만으로는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인생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불만족’을 떨치기 위해서는 직업 외에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넷은 ‘다른 일’이 모두가 같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영화일 수도, 음악일 수도, 등산일 수도, 달리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 ‘다른 일’이 서핑입니다.

모두가 바쁜 시대입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로 향하고 저녁 늦게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되는 ‘피로 사회’입니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똑같습니다. 낯빛은 창백하고 어깨는 축 늘어져 지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격려가 필요하겠지만, 베넷은 당근 대신 채찍을 듭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피로감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중략) 집에 도착하고도 곧바로 저녁을 들진 않습니다. 몸을 일으켜 영양분을 섭취할 마음이 내키려면 한 시간가량이 지나야 할 테죠. 그렇게 밥을 먹습니다. (중략) 친구들을 만나고, 빈둥거리고, 카드 게임을 하고, 제대로 읽지도 않는 책을 한 권 끼고 시시덕대다가 나이를 먹으니 이마저도 힘들다고 투덜대고, 산보를 다녀오고, 피아노를 만지작거립니다. (중략) 사무실 문을 나선 뒤로 여섯 시간 정도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꿈처럼, 마술처럼 증발해버린 것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과연 무슨 일을 한 건지 도무지 떠올릴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 나이가 얼마든, 무엇을 하든,
    어디에 살든 누군가가
    “당신의 취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하나쯤은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취미가 당신의 삶의
    만족감을 달리할 것입니다.

베넷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아침 시간을 활용하라고 강조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침에 좀 더 일찍 일어나십시오. 한 시간도 좋고, 한 시간 반도 좋습니다. 두 시간이면 더욱더 좋겠네요.”

아침은 생산성이 가장 높은 시간대입니다. 저녁에 두세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할 일을 아침이면 한 시간에 할 수 있다고 베넷은 주장합니다. 사실 이 주장은 저에게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한두 시간 일찍 일어나도 서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산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만. 그런데도 제가 베넷의 글을 길게 옮겨 적은 이유는 그의 생각에 수긍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을 찾고 그것을 위해 시간 활용을 잘하면 삶의 불만족을 떨칠 수 있다고 하는 그의 주장을 말입니다.

저는 서핑을 통해 삶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30대 후반의 가장으로 가족과 자녀를 부양해야 할 의무가 더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 버리고 떠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서핑 전후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자산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도 아닙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소득 수준은 비슷합니다. 다만 내가 어디에 언제 집중해야 할지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아들의 기준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물론 아직 모든 부분에서 부끄러울 정도로 서툽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연령대는 다양할 것입니다. 10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게는 20대에서부터 많게는 60대 이상도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나이가 얼마든, 무엇을 하든, 어디에 살든 누군가가 “당신의 취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하나쯤은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취미가 당신의 삶의 만족감을 달리할 것입니다. 제가 ‘다른 일’을 통해 업무 집중도를 더 높이고, 삶의 균형도 더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넷의 글을 인용하며 저의 짧은 이야기를 마칩니다. “취미에 열정을 쏟으며 지내다 보면 한 주의 시간 흐름이 빨라지고, 삶에 열의가 더해지며, 당신의 직업이 아무리 시시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흥미가 붙는 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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