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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A LIFE
여행스케치

휴양지인줄만알았지…
우리를 닮은괌의슬픈 역사

이인준 기자(뉴시스 건설부동산부)

‘미국에서 아침을 가장 먼저 맞는 섬.’ 올해 여름 휴가지로 선택된 괌은 내게 이 정도로 매우 단편적인 지식밖에 없던 생소한 곳이었다. 서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에 위치한 미국 자치령으로서, 미국령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다.

공항에 내린 첫날 괌의 인상은 하늘을 온통 뒤엎고 있는 구름이었다. 내가 도착한 기간은 비가 자주 내리는 우기(7~12월)여서, 갑자기 그리고 자주 스콜이 찾아왔다. 열대기후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정취였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이 물러가고 맑게 갠 하늘이 얼굴을 내미는 광경은 내게 정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괌은 총면적이 546㎢로 거제도와 비슷한 크기여서, 차를 몰고 다니면 하루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자연명소들을 다 둘러볼 수 있다. 특히 길이 48㎞, 폭 6∼14㎞로 남북으로 길쭉하게 늘어서 있다 보니 비가 오다가도 구름 아래를 지나고 나면 더 이상 비가 오지 않는 신비한 체험도 했다. 여행 기간 내내 만나는 현지인들의 밝은 표정과 친절, 그리고 자유분방한 태도 등은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새하얀 산호백사장에서 한적하고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해변도 아름다웠다.

괌에서 지낸 4박 5일간,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점이 있었다. 연간 150여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지만, 상당수가 우리나라 사람이다. 한국 교민도 많아 곳곳에서 한국말을 심심찮게 듣기도 한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괌의 역사는 우리와 닮았다.

괌을 설명하려면 식민지라는 슬픈 역사적 사건을 언급해야 한다. 괌은 오랜 기간 스페인과 미국, 일본 등에 통치가 되는 불행을 겪었다. 괌이 처음 외부 세계에 알려진 것은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 때다. 마젤란은 스페인 세비야항에서 출발해 대서양쪽으로 남하, 남아메리카의 리우데자네이루와 파타고니아(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을 건너던 도중에 괌을 발견했다. 마젤란에 의해 원주민 차모로(Chamorro)족은 4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지고 있던 자유를 박탈당했다. 괌은 그 이후 300여 년간 스페인에 의해 식민 통치를 받았다.

그러다 1898년 전환을 맞게 된다. 미국이 당시 패권을 다투던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하면서다. 이 싸움에서 이긴 미국은 1898년 파리조약을 근거로 이곳에 해군을 주둔시키면서 섬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1941년 발발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 점령되면서 열강들의 뺏고 뺏기는 싸움 속에 휘말려 전쟁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우리들의 역사에서도 일본의 강제징용에 끌려가 혹사당하거나 전쟁 중 사망하는 사람이 나왔다. 괌 현지에는 이때 당시 희생된 분들을 위한 추모비를 건립해 기리고 있다. 1944년 미군이 탈환할 때까지는 괌을 둘러싼 이 같은 각축전은 계속됐다.

괌의 슬픈 역사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괌은 미국 자치령으로, 연방에 편입되지 않는다. 미 연방하원에 옵서버 자격의 대표를 파견하지만, 주민들이 미국 대통령이나 의원을 뽑을 권리가 없다. 그래서 미국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독립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괌은 지정학적으로 미국에 매우 중요하다. 현재 괌 전체 면적의 4분의 1은 미군 기지로 수용돼 있다. 미국의 공군, 해군기지가 있고, 미국에서 보유한 각종 최신 무기들이 이곳에 배치돼 있다. 특히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가 설치돼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북한의 미사일도발에 가장 즉각적으로 대응이 가능한 미군 항공기지기도 하다. 그만큼 미국에 있어 괌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세를 과시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다. 한국과 일본을 우방으로 거느리면서, 확전하는 미중 갈등 속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는 마지노선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조선 말 이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미국의 남한 주둔, 가깝고도 먼 나라인 중국과의 관계 등을 놓고 생각해보면 우리의 역사와 정말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있다. 바로 언어와 글이다. 괌에 살던 원주민 차모로인들은 수백 년간 식민 지배를 받으며 원래 쓰고 있던 말과 글을 많이 잃었다고 한다. 현지 언어인 ‘차모로어’는 마젤란 상륙을 계기로 스페인어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특히 숫자와 인사 등이 많이 손실됐다고 전해진다. 현지 안내 책자에 따르면 현재 차모로어로 사용되는 숫자 1, 2, 3은 ‘우느(unu)’, ‘도스(dos)’, ‘트레스(tres)’로 스페인어에서 숫자를 읽는 법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말로 ‘안녕’을 의미하는 ‘부에나스 디아스(Buenas dias)’도 철자나 발음은 다소 다르지만 스페인어 아침 인사(Buenos dias)와 발음이 유사하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고, 외래어에 자리를 내준 셈이다.

이후에도 차모로어의 수난사는 끝나지 않았다. 괌은 미국 식민 통치시기에는 영어 사용을 강요받았고,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이 괌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일본어 교육을 철저하게 요구 당했다. 일제시대에 교육기관에서 황국 신민을 육성한다며 일본어 교육을 실시한 것과 같았다. 이후 괌은 다시 미국으로 통치권이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한동안 차모로어를 쓰는 것이 금지됐다.

우리의 경우 1991년 주시경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말모이’를 편찬, 이를 이어 받아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가 창립되는 등 숱한 노력으로 자국 언어를 온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괌이라고 저항의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 ‘사랑의 절벽’이 대표적이다. 한 차모로 여인이 사랑하는 청년과 맺어지지 못하고 부모에 의해 스페인 장교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게 되자 도망치게 되는데, 섬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들키면서 결국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 자신들의 사랑을 지킨다는 결말로 이어진다. 언뜻 보면 연인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지만 스페인 통치에 맞선 차모로인들의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많은 수의 차모로 원주민들이 학살을 당하거나 다른 섬으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수많은 나라들이 식민주의의 언어 정책 때문에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문명과 제국주의의 야욕으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을 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레비스트로스의 저서 ‘슬픈열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성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지 설명한다.

“문명이든 야만이든, 완벽한 사회란 없다… 어떤 적은 수의 사회를 비교하면 서로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조사의 영역이 확대되어 나감에 따라 이 차이점들은 점점 감소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어떤 인간 사회도 철저하게 선하지는 않다는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괌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한글을 지키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식민지 국가 중에서는 자국의 언어를 회복한 나라는 우리가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행운이다.

현지 책자에 따르면 현재 괌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가 대부분이다. 원주민 언어인 차모로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1900년 초 인구의 약 4분의 3에 달했으나 1970년에는 5분의 1 이하로 줄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현지 주민들이 차모로어의 부활과 보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이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괌의 공용어를 차모로어와 영어 2개 언어로 지정하는 법률이 1974년 제정됐고, 2013년부터는 공립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차모로어 과목이 필수가 됐다. 한번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부디 현지인들의 희망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또 미·중간 패권 다툼이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 속에서 이곳 괌에 평화가 다시 깃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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