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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A LIFE
Trend & Issue

‘빛 좋은개살구’,
워킹홀리데이

2009년 6월 9일. 22살 청년은 2년 1개월여 간의 군 생활을 마쳤다.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두려울 것이 없는 나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패기. 그러나 청년에게는 단 하나, ‘계획’이 없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세상에 홀로 나선 청년의 이야기. 10년 전, 나의 이야기다.

권성중 기자(건설경제신문 편집국 부동산부)

호주? 그게 뭔데?

대학교 1년을 마치고 5월이라는 애매한 시기에 입대한 탓에 ‘칼 복학’은 쉽지 않았다. 물론, 당장 공부보다는 마냥 놀고 싶었던 게 속마음이었다. 다만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몰랐다.

“나 9월에 호주에 가려고.”

군 전역 후 한 달쯤 뒤였을까. 모처럼 만난 군대 동기가 느닷없이 본인의 계획을 전했다. 알고 보니 동기는 전역 즈음부터 이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 호주에 살고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물며 파트타임으로 일할 것이라고 했다. 자연히 영어 실력은 늘 것이라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흥미로웠다.

워킹홀리데이. 만 18~30세 청년을 대상으로 방문국에서 1년간 자유롭게 취업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해 주는 제도로, 비자의 한 종류다. 관광취업비자라고도 한다. 그게 멋있어 보였던 이유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봐도 당시의 나는 그가 멋있다고 생각했음에 한 치의 틀림이 없다. 나도 호주에 가겠노라고 마음먹었다. 돌이켜 보면 이 결정은 분명히 5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이뤄졌다.

계획은 전혀 없었다. 비자 발급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신체검사를 받는 여러 날 동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최소한의 준비는 했다. 호주에서 지내게 될 집을 소개받기로 했고, 항공권 구매와 당분간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시간당 최저임금은 4000원. 야간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시급 4500원을 받았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계획 수립을 제외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10월, 호주 시드니행 비행기를 탔다. 혼자선 처음 타는 비행기. 환승. 약 12시간의 비행. ‘처음’이었기에 두려웠지만 비교치가 없어 막연했다. 어떻게든 됐다. 나는 호주에서 가장 큰 도시, 시드니에 도착했다.

행복의 유효기간=2주

반나절을 걸려 도착한 시드니국제공항에서 친구가 소개해 준 셰어하우스로 가기 위해 곧장 택시를 탔다. 도심지인 ‘시티’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Ashfield(애쉬필드)’라는 곳이었다.

내가 살 집은 기차역 바로 앞의 아파트였다. 방 하나, 거실과 주방이 있는 아담한 집이었다. 이미 3명의 한국인 남성이 살고 있었는데, 시드니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두 명이 한 방에 살고 있었고 집주인인 직장인이 거실을 썼다. 이 집에서 나는 어디에 몸을 뉘었을까. 다름 아닌 ‘소파’였다. 집세는 주당 50(호주)달러. 한화로 5만 원 정도였다.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시드니에서 단연 가장 저렴한 수준이었다. ※ 한국과 달리 호주에서는 집세나 임금 등 지급에서 ‘주급’(weekly pay) 체계를 사용한다.

나는 왕복 항공권에 당분간의 생활비를 위해 한국에서 150만 원가량을 준비했다. 항공권 구입에 80만 원을 지출하고 남은 돈은 70여 만 원. 이 정도면 집세를 감안하더라도 최소 한 달은 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호주의 물가는 한국과 판이하다. 재화 하나의 가격이 무조건적으로 비싸다기보다는 비싼, 그것도 너무나 비싼 것들이 따로 있다. 우선 교통 인프라 이용료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특히 시드니에서 지내는 내내 나의 발이 되어 줄 ‘트레인(train·한국의 지하철)’이 대표적이다. 기본요금은 3.6달러. 한 정거장만 가도 우리 돈으로 3600원이다. 담배도 비싸다. 당시 한국에서 2500원 정도 하던 담배 한 갑이 호주에선 1만 5000원이다. 흡연자인 나에게 이는 치명적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 음식이다. 한국 교민과 학생, 워킹홀리데이 청년들까지 많은 한국인이 있는 호주에는 ‘Korean BBQ' 간판을 내건 한식당들이 굉장히 많다. 음식 자체의 가격은 그래도 납득할 만한 수준이지만 술, 특히 한국 소주를 곁들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식당에서 판매하는 소주는 한 병에 13달러(1만 3000원)이다.

반면 너무나 저렴한 것들도 많다. 대표적인 게 식재료다. 세계적 농·축산국답게 채소와 과일, 육류는 굉장히 저렴하다. 일례로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셰어하우스 사람들이 환영파티를 해주겠다며 데려간 ‘Woolworth(호주의 대형마트)’에서 티본스테이크 500g은 6달러, 우리 돈 6000원에 불과했다. 오렌지는 2kg에 3달러 정도다.

시드니 도착 2주 만에 70만원의 생활비는 20만원으로 줄어들었다. ‘혼자 살아보려’ 떠났기 때문에 부모님께 지원을 요청할 순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의문의 취업

일단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호주 내 최대 한인 온라인 커뮤니티, ‘호주나라’에 무작정 접속했다. 당장 내일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러던 중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신체만 건강하다면 일할 수 있다는 구인공고가 눈에 띄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설명도 읽지 않았다. 명시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내일 오전 7시까지 출근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렇게 대책 없는 취업이 또 있을까.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고 나서야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불법적이거나 상식적이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단독주택의 지붕과 천장 사이 ‘△’ 모양 공간에 들어가 단열재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3~4인 1조로 작업용 트럭을 타고 다니며 의뢰가 들어온 집을 방문해 작업을 진행했다.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의 지리적 특성상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다. 호주의 10월은 초여름이었다. 통상 여름에는 40도 이상으로 기온이 오른다.

첫날부터 작업량이 많았다. 온 몸에 보호가운을 두르고 작업용 고글에 마스크를 착용한 채 지붕과 천장 사이로 들어가 작업을 해야 했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9시가 다돼서야 작업이 끝났다.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삭신이 쑤셨다. 일용직으로 채용돼 하루 동안 일하고 현금으로 받은 돈은 250달러. 25만 원 가량이었다. 나의 통장 잔고보다 많은 돈을 하루 만에 벌었다. 그렇게 시드니에서 나의 ‘직장 생활’은 시작됐다.

당시 호주의 시간당 최저임금은 1만 원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두 배가 넘는다. 현재는 1만 4000원 이상이다. 몸이 고된 일을 할수록 많은 임금을 주는 게 ‘상식’인 나라였다.

첫 직장에서 일주일간 쉬지 않고 일한 뒤 약 150만 원을 받았다. 일주일 만에 호주에 오기 위해 모은 돈을 벌었다. 자신감이 붙었다. 건장한 신체만 갖고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단열재 설치 작업을 시작으로 시드니에 머무는 1년 간 페인트공, 타일공, 배관공, 식당 종업원, 치킨 배달부, 간판 설치공 등 소위 ‘노가다’라고 여겨지는 직업 대부분을 경험했다. 시작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인 회사에도 곧잘 취업이 됐다. 부족한 영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 최고의 기회이자 위기

의문의 취업을 한 뒤부터 그야말로 정신없이 살았다. 새벽같이 출근해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주말에는 열심히 놀았다. 일용직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쉬고 싶은 날은 쉴 수 있었고, 자유로운 여행도 가능했다. 돈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으면 해당 국가에서 할 수 있는 학습과 취업, 관광 중 나는 ‘취업과 관광’으로 1년을 보냈다. 호주까지 가서 어학연수를 왜 하지 않고 돌아왔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경험해 본 바, 3가지 모두 만족할 만큼 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어학원들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와 관광을 겸할 수 있겠지만, ‘충분한 돈’을 모을 수가 없다. 이를 위해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장한 20대 청년이 굳이 그렇게까지 해가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No’다.

비록 아무런 계획이 없었지만, 나의 목표는 ‘호주에서 혼자 살기’ 단 한 가지였다. 경제적 자립이 우선이었고 여가시간에 무엇을 하느냐가 선택지였다. 한국에 돌아가면 대학교에 복학해야 했다. 즉, 학습의 의무가 예정돼 있던 것이다. 군대를 갓 전역한 20대 초반 남성이 언제 또 충분한 돈을 벌어 해외여행을 해보겠는가. 나의 생각은 그랬다.

매일 저녁 시드니의 명소, 오페라하우스와 달링하버 앞 잔디광장에선 많은 관광객과 호주인들이 여유롭게 앉아 시간을 보낸다. 이곳에서 은색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화투를 치며 소주를 마시는 무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은 한국인 청년들이다. 뚝섬유원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시드니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홀로 호주에 와 아는 이 하나 없는 데다 의사소통도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고향도 그리워 같은 처지의 한국인을 찾는 마음은 백분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서 이역만리 시드니까지 온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를 방문하는 청년 대부분은 20대 초·중반이다. 어린 나이이기에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최소한 한국을 떠나 무엇인가 혼자서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호주에 왔다면 1년이 결코 긴 시간은 아니다. 고향을 떠나온 외로움도 평생에 1년 정도는 느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당시를 돌아보면 참 많은 것을 얻었다고 자부한다. 일면식도 없던 이와 함께 살아도 보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친구가 되고, 내가 번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후회 없이 놀아도 봤다. 20대 청춘이라는 ‘특권’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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