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다집 감정평가사(가람감정평가법인 동부지사)
부산에서 5년 공시지가를 끝내고, 다음 지역을 고민하던 와중에 본사 공시위원의 문의 전화에 내 대답은 그랬다. 아직 애들도 어릴 때고, 부동산평가위원회니 검증이니 출장이 생각보다 잦은 공시지가 업무에 교통은 꽤 중요했다. 현장을 돌 때야 차로 현장 근처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돌아다니니 그게 그거였지만, 거의 1년 내내 지속하는 공시업무 특성상 KTX역이 있는 경주로 배정해준 본사 공시위원한테 나름대로 고마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처음 신경주역에 내리던 날, 경주는 참 낯선 느낌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천년 신라의 문화적 향기도, 경상도 사람들의 활기찬 사투리도 없었다. 그냥 용산역, 서울역처럼 신식 역사가 서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내내 기대했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들을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내가 갈 경주시청이 있는 경주 시내까지는 버스로 40분이 넘게 걸렸다. 정해놓은 일정이 급한지라 일단 버스를 타고 주변 풍경을 주시하면서 가다 보니, 슬슬 내가 아는 경주의 모습들이 시작됐다. 현대식 건물 옥상에 기와를 올리고 있는 건물들, 대릉원, 경주역, 그러다가 또 역시나 기와를 얹고 있는 한전 건물을 지나니 경주시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표준주택 업무도 담당하던 시절이라, 토지정보과에 세무과 직원들까지 다 인사를 하고 나니 어느새 저녁 무렵이 됐다. 나는 내 지역 담당 공무원분은 만나지도 못한 채 마침 대구에서 오신 감정평가사님 차를 얻어타고 신경주역으로 기차 시간에 맞춰서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 후, 현장조사를 더 늦추면 안 될 것 같아 차를 몰고 경주로 내려가는데 경주는 참 먼 곳이었다. 경상북도는 동해를 접하고 있었고, 경주는 그 동해를 접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가장 먼 경북이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공시업무를 할 때는 마침 부산에 계신 대학 선배 감정평가사님의 차로 현장을 다녔던지라 장거리 운전으로 현장을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은 미처 생각지를 못했다.
2시간을 운전해 처음 들린 휴게소에서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첫날이지만 30필지라도 볼 생각에 다시 내 담당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처음 경주 6팀 중의 1팀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항공사진을 펼쳤다. 광활한 경지정리 지역이 펼쳐진(그게 사실 안강뜰이었다) 모습에 쾌재를 불렀었는데, 도면 작업을 하다 보니 정작 경지정리 지역엔 표준지가 몇 개 없었다. 보통 600에서 700개가 활용되는 소위 이유 있는 과다 활용 표준지만 띄엄띄엄 있는 것이었다.
일단 숙소를 잡고, 현장을 보려고 읍내로 나가려는데…. 그랬다. 그날은 5일에 한 번 열리는 장날이었다. 차는커녕 사람도 지나다니기 힘든 지경을 헤치고, 꽤나 두껍고 무거운 지도책이랑 초안지를 들고 현장을 볼 엄두가 안 났다. 그렇게 경주 공시업무의 첫날은 내일 아침 일찍 나서리라는 다짐만 하고, 모텔방에서 지나가 버렸다.
드디어 이틀째. 이젠 차로 돌아다닐 만한 읍내를 시작으로 현장조사를 시작했고, 난생처음 보는 수평적 주상용 건물도 만나보고(앞집은 상가, 뒷집은 살림집이 한 필지에 소재하는 그런 식이다), 내 지역 최고 지가인 대형마트도 방문하며 현장조사의 피치를 올려 나갔다. 읍내를 벗어나서 현장조사를 이어가다 보니 고역은 점심이었다. 현장에 식당이 거의 없었던지라, 김밥을 사서 가보기도 하고 점심때 읍내로 돌아와서 먹어보기도 했는데 이것 참 마땅치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임대아파트 건설현장이 있어서 그 근처 백반집에서 다소 메뉴가 중복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먹을만한 식당을 두세 군데 알아내서 거기서 해결을 하는 것이 그나마 몸이 덜 상하는 거 같았다.
그런데 한 이틀 현장을 돌고 보니, 왜 경주에 6팀이나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너무도, 너무도 경주는 넓은 곳이었다. 지자체 중 전국에서 경주가 면적으로는 1등이라더라 이야기가 실감이 갔다(사실 알고 보니 1등은 강원도 홍천군이고, 경주는 5등 정도였다). 게다가 난 안강읍 외에 강동면도 담당이었고, 경주 6팀 중에서도 제일 필지가 많은 팀이었다. 나랑 파트너 감정평가사님은 비상이 걸렸다. 이 정도 속도면 주5일, 일 12시간(해 뜨면 시작해서 해지면 끝내는)을 돈다 해도 최소 4주, 비 오고 어쩌고 하면 5주는 꼬박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다. 회사업무를 내팽개치고 있을 수도 없는지라, 결론은 두 달은 걸려야 현장이 끝날 예정이었다. 운전이라도 줄이려고 차는 안강역 앞 주차장(다행히 시골 역 주차장은 무료였다)에 세우고, 무궁화 열차를 타고 동대구에서 갈아타는 루트로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현장을 돌다가 읍사무소 공무원하고 점심을 먹게 됐는데, 악성 민원이 있으니 현장을 돌 때 유심히 좀 살펴봐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공시지가가 너무 비싸다고 하는 할머니가 계시는데 이야기 좀 잘 들어달라고. 다음 주 정도에 그 지역 현장을 돌 예정이라 염려 마시라고 하고는, 초안지1에 표시해놓고 당연히 금세 잊어버렸다. 사실 민원은 감정평가사의 숙명과 같은 것 아닌가. 아무튼, 다음 주가 되었고 가을이지만 너무도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현장을 돌고 있는데 초안지에 쳐진 별표가 눈에 띄었다. ‘할머니, 얘기 잘 들어줘야 함’ 메모가 적혀있었다.
참 오래되고, 낡은 집이었다. 소위 시멘트 기와지붕 목조주택이었고 사용승인일은 1960년 1월 1일. 아마도 그때 건축물대장에 등재가 된 것이지 실제로는 훨씬 그 전부터 지어져 있었을 집이 분명했다. 짚에 황토를 섞어서 마감해놓은 벽에 창호지가 발린 목제 창틀, 그렇다고 전통 한옥이라기보다는 옛날엔 초가집이었을 그런 시골의 오래된 집이었다. 게다가 마당에는 쓰레기가 한가득 쌓여있었고, 한쪽에는 아마도 외양간으로 쓰다가 지금은 창고가 된 제시 외 건물2이 안채 우측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툇마루 밑으로 신발들이 놓여있는 걸 보니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것 같았다. 일단 사진을 찍고 다음 현장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그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복귀하는 길에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 굳이 그 집 앞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집 앞에서 차를 멈추고 보니 웬 꼬마와 젊은 아줌마가 방문을 열고 그 집에서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민원인이 할머니라고 했었는데 어르신은 보이지를 않았다. 사실 공가나 폐가만 아니면 되는지라 멈춘 차를 다시 이동했다. ‘그 아줌마는 딸이었을까 며느리였을까? 할머니는 같이 살고 계시는 걸까? 손주를 보여주려고 잠시 내려온 걸까?’ 알 길은 없었다. 시장에서 막걸리 한 통이랑 순대를 사 들고 숙소로 들어와서 하루의 노고를 치하하는데, 그 두 사람의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났다. 악성 민원인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왠지 애틋하고 신경 쓰이는 모녀의 모습이(사실 모녀인지도 난 모르지만) 저녁 식사 내내 아른거렸다. 왠지 아련하고 애틋한 두 모녀의 모습이….
도면에 그려진 저 수많은 표준지와 표준주택은 내가 처리해야만 하는 업무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을 보면서 세로(가)3인지 세로(불)4인지, 혹시나 단독주택이 상업용으로 바뀌었는지 그냥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곳은 아빠가 보고 싶은 어느 꼬마의 투정을 받아줘야만 하는 젊은 엄마의 보금자리일 수도 있었고, 어르신의 길고도 고달팠던 인생의 마지막 쉼터일 수도 있었다. 서울 어딘가 한 뼘 땅만큼의 가격도 안 될 오래되고 낡은 집이었지만, 그 의미만큼은 소위 평창동의 회장님 집보다 굳이 덜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다들 소중한 것들이었다.
사실 구체적인 그 뒤의 처리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무실에 복귀해서 검토를 해보니 마침 과소 활용 필지라서 삭제한 것 같기도 하고, 가격 수준이 적정해서 그냥 원래대로 존치한 거 같기도 하고…. 경주 공시지가에서의 마지막 해에 그곳 근처의 흥덕 대왕릉의 소나무 숲에 앉아서, 저기 보이는 집이 그 집인가 다른 집인가 멀리서 찾아봤던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날 이후로 공시업무에서든 담보 감정평가에서든, 아무리 금액이 적고 면적이 작은 물건이라고 해도 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재산이고 의미일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감정평가사라는 직업이 무언가의 가치를 단순히 숫자로 변환만 하는 일일 뿐이라고 한다면 사실 별 재미가 없다. 하지만 세상만사 모든 일엔 항상 사람들이 함께한다. 그 사람들의 삶이, 사연이, 노력이, 애환이 깃들여져 있다. 괄호감정표의 금액이 미쳐 다 보여주지 못하고 있을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내가 하는 이 일이 그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 자신의 삶도 내가 모르는 어느 누군가의 그런 응원 속에 도움받고 있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