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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A LIFE
Insight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뤄지는
인류 발전의   기적

이신철 기자(이투데이 사회경제부 부동산팀)

2007년 1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유럽연합 중 어떤 국가의 환경부장관은 중국과 인도를 급속도로 진행 중인 기후 변화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신흥 경제대국이 점점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추세이며, 실제 중국의 경우 당시 미국보다, 인도는 독일보다 배출량이 많다는 지적이다. 이 말에 격분한 인도 토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 주장을 반박한다.

“우리 모두를 이런 힘든 상황으로 내몬 건 제일 잘 사는 당신네 나라들입니다. 당신들이 한 세기가 넘도록 많은 석탄과 석유를 사용해왔습니다. 우리를 기후변화의 벼랑까지 몰고 간 건 바로 당신들입니다.” 이 말을 마친 그는 화를 다스린 뒤,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제안을 한다.

“하지만 용서하겠습니다. 해를 끼쳐도 모르고 했다면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없죠. 대신에 지금부터 이산화탄소를 ‘1인당’ 배출량으로 계산합시다.”

국가별 총 배출량을 기초로 중국과 인도를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꼽는 것은 중국 전체 인구의 몸무게 합이 미국보다 크므로 미국보다 중국의 비만이 심각하다고 주장하는 꼴이었던 셈이다.

의사이자 세계적인 통계학자인 한스 로슬링은 사실에서 우리 두 눈을 가리는 인간의 10가지 본능을 꼽았다. 이를 ‘팩트풀니스’(FACTFULNESS)라는 저서로 정리해놓은 그는 위 에피소드가 ‘크기 본능’이 어떻게 사실을 가리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사례로 꼽았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2016년 420만 명의 아기가 첫 번째 생일도 맞지 못하고 죽었다. 언뜻 보기에 끔찍한 수치다. 하지만 무지막지해 보이는 이 수치를 다른 수치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사망한 아기 숫자가 그 전해에는 440만 명, 또 그 전해에는 450만 명이었으며, 1950년에는 1440만 명이었다.
비율로 보면 전체 아동 사망률은 1950년 15%였는데 2016년 3%로 줄었다. 2016년 통계 하나만 놓고 보면 비극이지만 과거 수치와 비교하면 세계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중국과 인도의 이산화탄소 총 배출량, 2016년 아기 사망 통계 등에 관해 비교와 비율을 따지지 않으면 사람은 그 크기에 주목하고 왜곡된 세계상을 갖게 된다. 그 결과는 기후변화 해결에 동참해야 할 미국·유럽의 책임이 가려지는 것이고, 아동 사망을 줄이기 위해 그간 들여온 사람들의 노력이 깡그리 무시되는 것이다.

아무리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이러한 본능에서 벗어나 사실을 잘 보진 않는다.

오늘날 세계 모든 저소득 국가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여성은 얼마나 될까? 1번 ‘20%’, 2번 ‘40%’, 3번 ‘60%’ 중 한 번 골라보자.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1번 ‘거의 2배로 늘었다’, 2번 ‘거의 같다’, 3번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 같은 문제를 침팬지에 줬다고 해보자. 사실상 찍는 것이 다이기 때문에 정답률은 33%가 나올 것이다. 정답을 공개하겠다. 앞 문제도 뒤 문제도 정답은 3번이다. 틀렸다면 놀라지 않아도 좋다. 한스 로슬링이 이 같은 질문을 고학력자 상대로 한 결과, 앞 문제의 경우 한국의 정답률은 10%, 뒤 문제는 4%였다. 결과만 놓고보니 사람이 침팬치보다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유는 앞서 소개한 크기 본능을 포함, 인간의 10가지 비합리적인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간극 본능’이다. 세계가 극과 극으로 나뉠 거라는 이분법적인 사고 체계다. 이를 대표하는 개념어가 바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다. 세계 인구의 다수는 저소득 국가도, 고소득 국가에도 살지 않는다.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은 우리에게 다소 어색한 단어인 ‘중간소득 국가’에 인구 75%가 산다. 드라마와 뉴스가 억만장자와 극빈층을 주로 다루는 것은 그러한 극단이 흥미롭고 도발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를 통해 왜곡된 인식이 세상의 다수가 그 틈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또 하나 우리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것이 ‘부정 본능’이다. ‘상황이 점점 나빠진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실제 영국의 여론조사기관인 유고브(Yougov)와 입소스모리(Ipsos MORI)가 설문한 결과를 종합하면, 미국·영국·프랑스 등 세계 주요 30개국 모두에서 설문참여자 다수가 ‘세계가 더 나빠지고 있다’는 인식을 보였다. 한스 로슬링은 이 또한 부정적인 소식이 주목받고 긍정적인 소식은 묻혀버리는 현실이 만든 왜곡이라고 본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근본적 발전인데도 하나하나가 너무 느리거나, 너무 파편적이거나, 너무 작아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를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뤄지는 인류 발전의 기적’이라고 칭한다. 실제 가난한 사람이 지금도 늘어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하루 2달러(인플레이션·물가반영) 미만을 버는 극빈층은 1966년 50%에서 2017년 9%로 줄었다. 그렇다고 9%가 낮은 수치이니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상황이 나쁘지만 나아지고 있는 사실이 ‘그저 나쁘다’로 치환되기 쉽다는 것이다.

어떤 추이를 예측할 때 오해를 만드는 것으로 ‘직선 본능’이 있다. 통상 세계 인구는 ‘단지’ 증가할 뿐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 ‘단지’라는 말은 그대로 두면 인구가 계속 늘어날 것이며, 이를 막기 위해선 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냥 두면 인구 그래프가 직선 형태로 쭉 올라갈 거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유엔이 전망하는 세계 인구 중 0~15세 아동은 현재처럼 20억 명을 앞으로도 유지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2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전체 인구 곡선이 100~120억 명사이에서 평평해질 것이란 예측으로 이어진다. 경제발전, 교육 개선 등이 여성의 출산 아동 수를 줄이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의 많은 변화가 직선 형태로 이뤄지지 않는다.

또 하나 인간의 이성을 정지시키는 요인으로 ‘공포’가 있다. 세상의 온갖 정보를 모두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극적으로 들리는 정보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공포는 그중에서도 우리의 ‘생존’과 연관 지어지면서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이를 통해 생기는 오해가 재해와 비행기 사고가 늘고 있다는 인식이다. 1930년대 인구 100만 명당 연간 재해 사망자는 453명에서 2010~2016년 10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재해의 끔찍함을 전하는 뉴스는 더 많고, 생생해졌다. 언론 또한 ‘공포’ 뉴스가 주목도를 끈다는 것 알기 때문이다. 2016년 4,000만 대의 상업 항공기가 목적지에 무사 착륙한 사실은 묻히고, 이 가운데 치명적인 사고가 난 10대의 비행기만 뉴스에 나온다. 특정 사안에 대한 공포와 그것의 위험 수위가 꼭 비례하지 않는다. 지난 20년간 미국에서 테러로 사망한 사람은 3172명이지만, 음주로 사망한 사람은 140만 명이다. 공포 본능은 무서워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것을 주목하게 하고, 위험하지만 무서워하지 않은 것을 외면하게 한다.

‘일반화’하려는 본능도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말로 친숙하게 알고 있다.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에서 에볼라가 발생했을 때, 그 지역서 차로 100시간 달려야 도착하는 케냐의 관광산업이 타격을 입는 일이 발생했다. 두 지역은 영국 런던과 이란 테헤란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아프리카’라는 일반화가 이러한 어이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다’는 말처럼 국가, 종교, 문화 등이 변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하는 ‘운명 본능’, ‘아이한테 망치를 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같이 한 관점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할 때 현상을 잘못 해석하는 ‘단일 관점 본능’, 어떤 사안을 초래한 시스템 대신 특정 대상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비난 본능’, 누군가 급하다고 부추기면 쉽게 선동되는 경향인 ‘다급함 본능’ 등이 세상을 왜곡해서 보게 하는 본능들이다.

이러한 본능들을 제어해 사실을 보려는 태도를 한스 로슬링은 ‘사실충실성’으로 정의한다. 그의 저서 제목을 번역한 말이기도 하다. 그는 저서에서 사실충실성을 통해 목숨을 구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그가 콩고 민주공화국의 한마을에서 불치 유행병이던 ‘콘조’를 조사하러 파견 나온 때 일이다. 어느 날 50여 명의 성난 무리가 정글칼까지 들고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마을 주민들의 혈액 샘플을 모으는 과정이 피를 팔아 돈 벌려는 행위로 오해받아 생긴 일이었다.

침착한 상태를 겨우 유지한 그는 과거 콘조 연구를 위해 다른 지역에 나갔던 사진까지 보여주며 성난 무리를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도 정글칼을 쥔 남자가 그에 대한 위협 수위를 높여갔다. 그때 쉰 살 정도로 보이는 맨발의 여성이 앞으로 걸어 나와 무리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 말이 일리가 있어. 피검사를 해봐야 해. 홍역으로 죽은 아이들이 기억 안 나? 아이들이 예방주사를 맞은 뒤로 홍역이 없어졌잖아.” 피검사 필요성에 대해 연설을 이어간 그녀는 스스로 피검사를 받겠다며 그 앞에 줄까지 섰다. 화를 내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 뒤로 서기 시작했다. 성난 군중이 사로잡혀있던 극적 본능을 그녀는 눈치채고, 주삿바늘과 피가 주는 공포 본능과 그를 약탈자로 보는 일반화 본능을 이성적인 설득으로 제어했다. 그녀의 사실충실성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며 한스 로슬링은 회상했다.

그녀를 통해 목숨을 건졌던 한스 로슬링은 사실충실성이란 개념을 저서를 통해 남기는 과정에서 완성을 끝내 못 본 채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저서는 그의 공동저자이자 딸인 안나 로슬링 뢴룬드에 의해 성공적으로 세상에 출간됐다. 그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할 때 오히려 우리 세상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전했다. 사실을 전달해야 할, 그렇지만 음울한 소식만 찾았던 기자가 외면할 수 없던 그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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