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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2
* 이 글은 배명부 감정평가사님(명품감정평가사사무소)께서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2」 책을 요약하여 기고한 글입니다.
** 2025년 「감정평가」 봄·여름호 내용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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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명부 감정평가사(명품감정평가사사무소)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2
- 저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지음, 이웅현 옮김
- 페이지 수 570쪽
- 발간일 2019. 9. 23.
이어가면서
2024년 「감정평가」 봄호에서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연구의 종합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름은 ‘러일전쟁’이고 내용은 ‘동아시아전쟁’이지만 본질은 ‘조선전쟁’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라고 기술하였다. 전호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완수한 결과, 일본은 1870년부터 조선출병론의 제안에 이어 줄기차게 침탈 야욕을 드러내었고,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에는 노골적인 조선점령 실행계획을 진행하면서 러시아와는 긴장 고조를 유발시켜 군사적인 우위를 빌미로 전쟁 준비의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러일전쟁 개전까지의 일본의 대러시아의 가식적인 교섭, 협상 과정과 그들의 개전의 불가피 성을 짚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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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러일교섭
교섭의 개시와 일본의 제1차 제안
러일교섭은 일본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1903년 7월 28일 고무라 외상이 구리노 러시아 공사에게 전보를 보내 러시아와의 협상 교섭 개시를 지시한 것이 시작이었다. 구리노 공사는 7월 31일 람스도르프 외상을 방문해 구상서(口上書)를 전달했다. 1903년(메이지 36년) 8월 12일 구리노 공사가 람스도르프 외상에게 전달한 일본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제1조 : 펑.한 양 제국의 독립 및 영토보존을 존중할 것. 또한 양국에서 각국의 상공업을 위해 기회균등주의를 지녀야 한다는 점을 상호 약속할 것. 제2조 :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세한 이익을 승인하고, 일본은 만주에서 철도 경영에 관한 러시아의 특수한 이익을 승인할 것. 제5조 : 한국에서의 개혁 및 선정(善政)을 위해 조언(단 필요한 군사상의 원조를 포함할 것)을 제공하는 것을 일본의 전권(專權)에 속한다는 점을 러시아가 승인할 것. 제6조 : 본 협약은 한국에 관하여 일러 양국 간에 종전의 체결된 모든 협정을 대체할 것.
이렇게 해서는 만한(滿韓) 교환론이라 할 수 없으며, 만주에서 러시아가 지닌 지위에는 제한을 가하면서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것을 러시아에 승인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러시아의 이익을 최소한으로 하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고무라의 안중에 없었다. 그야말로 마치 한국을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다.러시아의 사정
그런데 일본의 제안이 러시아에 전달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 내에서는 혼란이 일고 있었다. 8월 12일 베조브라조프가 추진한 극동태수제 설치가 단행되었고, 구파(舊派)가 이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이렇게 내부 전쟁은 이미 양 진영 사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8월 14일 재무상, 육군상, 외상의 세 장관은 조선 문제를 뤼순회의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로서는 이렇게 바람직하고 평화적이며 확고한 만주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조선에서 일본과의 위험한 충돌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체의 적극 정책을 삼가는 것이 무조건 필요하다고 본다”는 데에 합의했다. 이에 베조브라조프는 세 장관의 축출에 나섰다. 첫 번째 표적은 쿠로파트킨이었지만, 황제는 세 사람 가운데서 심리적으로 가장 반발하고 있던 비테 재무상을 해임했다. 8월 28일 황제는 비테를 불러서 장관위원회 의장직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러.청 교섭의 중단
람스도르프 외상의 지시를 받은 베이징 주재 공사 레사르는 9월 4일 청국 외무부에 5개 항목의 보상요구를 제시했다. 9월 8일에는 청국이 이 내용을 일본 공사와 영국 공사에게 통보했으며, 청국의 외교책임자 칭친왕은 우치다 일본 공사에게 말했다. 이에 고무라 외상은 우치다 공사에게 훈령을 내렸다. “이 요구는 청국의 주권을 확실하게 침해하고, 다른 열강의 조약상 권리를 틀림없이 무시하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정식으로 엄중히 항의한다. 베이징에서 행해진 교섭이 성공을 거둘 수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고 했다. 10월 1일 황제는 이 제안을 승인했으며, 람스도르프 외상은 이 결정에 반대했다. 자중지란의 한 단면이다.러시아의 대일회담 준비
일본과의 회담을 위해서 람스도르프 외상, 베조브라조프의 5개 항목의 대안을 준비했다. 베조브라조프의 의견은 무엇보다도 명확하게 일본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동에도 문제가 있었다. 알렉세예프와 로젠의 호흡이 맞지 않았다. 로젠은 러일교섭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알렉세예프를 경멸하는 경향을 보였다. 로젠은 9월 15일 알렉세예프에게 자신의 안을 보냈다. 알렉세예프는 이에 불끈 화가 치밀었으며, 자신이 작성한 대안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쪽의 안도 1901년의 람스도르프안을 개량한 것이며,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로젠의 회고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합리적인 일은, 만주를 고집하고 조선에서 서둘러 도망치는 일일 것이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패배주의의 극치였다.
한국 정부, 중립을 추구하다
한국에서는 점차 러일 간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8월 1일 자 『황성신문』은 ‘일본은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설을 게재했다. 민간의 논의는 이렇게 반러시아적이었다. 교섭은 결국 전쟁을 초래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고종은 대립하는 양자 사이에서 “우리는 엄밀하게 중립을 지킬 작정임을 미리 선언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러시아와 일본이 우리를 중립국으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장래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여하한 작전도 우리나라의 국경 안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어떠한 군대도 우리나라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우리 국경의 보전을 보장한다는 명료한 회답을 요구한다”라고 했다. 이것이 더 현실적인 주장이었다. 9월 10일 자 『황성신문』은 ‘만한교환의 풍설을 파(破)한다’는 논설을 게재했다. “만한교환론이라는 것은 러시아가 제시한 ‘민휼(敏 譎)한 수단’, 즉 교묘한 사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은 ‘동양의 한 독립제국’이며, ‘러일의 보호 속방’이 아니다. 제멋대로 교환이라니 이 무슨 일이냐”며 분노했다. 9월 26일에 고무라가 주일 한국 공사에게 전시 중립을 보장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에 대한 일본 정부의 회답을 보냈다. “일본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전시 중립 등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회답이었다. 일본은 “현 황실의 영구존속을 옹호하는 확고부동한 각오를 하고 있으며, 뒤의 두 가지 개혁도 원조를 희망한다면 응할 것이다”고 했다. 이는 교묘한 협박에 거짓 약속, 게다가 작은 미끼를 섞어 놓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한국이 중립을 확보하고 싶다고 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개전하게 되면 한국을 즉시 자신들의 지휘하에 둘 작정이었다. 그 간의 일본 측의 회담 내용을 보면 명약관화하다.
우리는 엄밀하게 중립을 지킬 작정임을 미리 선언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러시아와 일본이 우리를 중립국으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일본 국내의 개전 요구와 주일 무관의 경고
일본 국내의 흥분은 한층 고조되었다. 정부의 정책이 미온적이므로 더욱 강력하게 교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조선으로 출병해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게 제기되었다. 9월 10일 개최된 후쿠오카 대러 동지회 규슈대회에서는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결단코 이를 좌시할 수 없다”고 했다. 정부는 “러시아를 엄책해 철병 약속을 이행하게 하고, 제국의 명예와 이권을 매섭게 지키는 일을 하루라도 빨리 단행할 것을 정부에 경고한다”고 결의했다. 14일에 동지회 대표 3명이 가쓰라 수상을 방문, “우리 정부의 당국자는 차제에 러시아 정부를 향해 최후의 결심으로써 최후의 결답을 촉구해야 한다”는 경고문을 전달했다. 17일에는 센다이에서 대러 동지회 도호쿠대회가 개최되어 3,500명이 모였다. 결의는 한층 과격해졌다. “최근 러시아의 행동은 우리 제국에 대한 무언의 선전이다. 제국이 만약 이를 여전히 용인하면, 이는 동양의 평화에 대한 불충이며 또 제국이 자기의 이익 및 명예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당국자는 어서 빨리 최후의 수단을 단행해야 한다”라며, 벌써 개전 전야의 분위기였다.
일본 주재 러시아 무관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해군 무관 루신이 9월 2일에 보낸 전보가 아마도 가장 상세한 분석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보 내용은 “이상할 정도로 고조된 일본인들의 자의식은 영.미의 정신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일본인들은 우리 군사력의 존재와 극동의 배치에 관해 알고 있으며, 기대감을 높이면서 전쟁 초기에 자국군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였다. 루신은 일본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극동의 러시아 육해군력 증강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확실히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이때 니콜라이 2세는 태평하게 사냥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러시아의 제1차 회답
9월 28일 알렉세예프가 로젠과 정리한 러시아의 회답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회답 작성의 어려움을 느낀 이유는 일본의 안(案)이란 것이 이를 기초로 삼자니 일본과의 협정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박탈할 정도로, 우리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강한 욕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협정을 위한 유일한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은 일본이 만주를 완전히 자신들의 이익권 밖에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조선 땅에서 일정한 양보를 할 수 있다.”
요약하면, 한국 영토의 3분의 2에 대해서 일본을 구속하는 조건부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만주를 러시아의 배타적인 세력권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한 것이다.가을의 위기(1903년)
알렉세예프와 로젠이 대일 회답을 마무리한 직후 위기가 본격화되었다. 루신뿐만 아니라 주재 무관 사모일로프도 일본의 조선 출병에 관한 경고를 보냈다. 중요한 것은 황해 쪽 서부해안으로의 상륙이었다. 만주 및 관동주와는 눈과 코끝의 거리만큼 가까운 곳에 일본군이 상륙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10월 초 신문의 논조가 확실히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10월 2일 자 『오사카아사히신문』의 논설 ‘국민의 결심을 촉구한다’ 내용에는 “여기서 일전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썼다. 10월 9일에는 ‘텐잔’이라는 필명의 ‘최후의 결단(명분은 이미 차고 넘친다)’을 실었다.
“저들 러시아, 이미 만주에서 우리를 능욕하는 형태가 극에 달했다. 그리고 또다시 한국에서 그 주권과 독립을 훼상하고, 동시에 일러 협상의 정문을 감히 유린하는 망상을 저지르고 있다.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천하에 무엇을 참지 못하겠는가? 그만하라, 말로만 하는 경고, 신문지면의 항의, 공허한 천만 마디의 말들, 필경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다”러일 해군력 비교/러시아 정부의 대응
『도쿄아사히신문』 9월 26일 자에 ‘일러 해군세력 비교’라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은 본인들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견지하고 있었다. 승부를 겨룰 수 없을 정도로 러시아가 열세였다. 일본은 이 우세를 더욱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새로 건조된 함선의 획득에 주력했다. 한편 다름슈타트로 돌아와 알렉세예프의 전보를 본 황제는 경악했고, 공포에 휩싸였다. 당황한 황제는 보고하러 온 람스도르프에게 “짐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알렉세예프에게 곧장 전보를 쳐야겠다. 회신 초안을 만들라.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은 일체 회피해야 한다”고 명했다. 알렉세예프는 황제의 전보를 받고 곧바로 10월 8일 회신을 보냈다(패배자를 자처하는 내용임). 이 시기에 육군장관 쿠로파트킨은 휴가 중이며, 해군장관 아벨란, 군령부장 로제스트벤스키 등 해군성 수뇌부의 무능과 무기력함이 드러났다. 장관들이 그런 정신 상태였다면 황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알렉세예프에게 전쟁을 금했던 황제는 계속해서 태평한 시간을 보냈다. 당해 가을, 황제 일가는 처음으로 자동차를 입수해 타고 돌아다니면서 열광하고 있었다.
일본의 제2차 서한
고무라는 10월 6일에 로젠을 불러 교섭을 개시했다. 로젠은 러시아가 한국에 관해서 대폭 양보하고 있는데, 만주 관련 조건을 다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고 회답했다. 고무라는 10월 14일 재빨리 수정안을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제2차 서한이 양보한 모습을 띠게 된 이유가 원로들의 반격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고무라 등이 그보다 더 중시해야 했던 것은 동맹국 영국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고무라는 수정안에 대해 란스다운 외상의 의견을 구했다. 핵심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러시아가 완전히 승인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 군인들의 의견
일본 해군은 야마모토 해군상이 주전론자들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부서 내의 주전론자들을 멋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편 러시아군부에서는 대부분 전쟁의 위기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일관성 있게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하고 있었다. 쿠로파트킨 육군상은 이미 1901년부터 러시아에게 중요한 것은 북만주와 동청철도의 연선이라고 했다.
작가 불명, 『너무나도 현신적인』(So Olbliging), 『브룩클린 이글』(Brooklyn Eagle), 1904년 2월 17일(출처 : 한길사 제공)러시아 측의 제2차 서한
11월 7일 람스도르프는 알렉세예프에게 일본의 제2차 안에 대한 회답안 작성을 요청하였다. ‘일본에게 유리하도록 수정한 제2차 안’을 보낸다고 쓰여 있었다. 제1조는 일본의 청.한 양 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존중한다는 안을 거부하고, 한제국의 독립 및 영토보존을 존중할 것을 상호 약속할 것과 제7조는 일본이 제시한 만한교환론을 거절하고, 만주는 일본의 이해권 밖이라는 제1차 서한과 같은 표현을 거듭 주장했다. 결국 알렉세예프는 교섭이 타결에 이를 수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11월 초가 되어 루신은 1904년 봄이 위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개전을 촉구하는 일본 여론
11월 8일 대러동지회는 이토 등이 ‘대러 문제를 논하는 각의에 참여함으로써 생기는 제약’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후작(이토) 등이 황공하게도 지존(천황)의 특별한 총애를 믿고 그 사이에 함부로 입을 놀려 국시 단행을 방해함으로써 국가 백년의 대계를 그르치는 일이 있으면, 그 죄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이에 우리는 국민의 공분을 이토 후작에게 경고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심절한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제 대동동지회의 화살은 야마모토 곤베에 해군상에게도 겨눠졌다. 대러동지회의 목소리는 바야흐로 보편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대러동지회는 12월 12일 대러 정책에 관한 상주문을 천황에게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상주문은 12월 15일 궁내성에 제출되었고, 이날 신문들에 보도되었다. 대의는 “러시아는 결코 평화를 기조로 제국과 협상하겠다는 성의가 있지 않다”면서 “제국(일본)은 결코 병(兵)을 선호하고 전(戰)을 하고자 하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이 간과에 호소해서라도 우리의 신성한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정부가 지나치게 신중해 구차해지고 시기를 상실해 대사를 그르쳐서, 이로 인해 국가 백 년의 화환을 남기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국민 적개의 충성을 피력하고, 삼가 성감을 우러러 청한다”는 것이었다. 소위 정의의 전쟁을 이끌어 달라는 주문이다.
일본의 제3차 서한
러시아의 제2차 회답은 12월 14일 고무라가 맥도널드 공사에게 즉각 전달했다. 일본은 12월 16일 수상관저에서 각료 및 원로 회의를 열어 러시아의 제2차 회답을 검토했다. 가쓰라와 고무라는 “만주 문제는 외교적 수단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담판을 시도하고”, “조선문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수정한 희망 사항을 충분히 진술해, 저들이 듣지 않을 경우에는 최후의 수단을 관철한다”는 주장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즉 조선 문제를 빌미로 개전하자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 회의에서 시종일관 야마가타의 제안에 대해 야마모토의 거듭된 반대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2월 21일 로젠 공사에게 일본의 제3차 제안이 전달됐다. 12월 26일 자로 알렉세예프가 일본의 새로운 제안에 대한 의견을 황제에게 보냈다. 로젠은 12월 31일에 니콜라이에게 전보를 쳤다. “조선 문제로 일본과 군사 충돌할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지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만주 문제는 일본과의 개전 사유가 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엄밀하게 방위적’이며, 일본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든 그것은 ‘근거 없는 침략성’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 역시 만주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조선에서의 과제 실현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결의의 모든 징후’가 보인다. 조선에 관해서도 그리고 만주에 관해서도, 일본과 협정을 체결할 필요는 없다. 조선에 관해서는 일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일본군의 조선 출병에 관한 정보
이때 일본은 곧장 전쟁 준비로 치닫고 있었다. “우리 제국이 한국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있지 않은 한, 제국의 지위를 위해서 러시아의 행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말싸움을 중지하고, 한국에 일부 출병하는 동시에 1, 2개 사단과 중요한 요새를 동원해 충분한 결심을 보여주고, 위력을 담판의 뒷받침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일대 결전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12월 21일 정부가 육해군에 대해서 ‘언제라도 출병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취지의 통첩’을 보냈다고 한다. 12월 하순이 되자,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해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는 정보가 도쿄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잇달아 타전되었다. 12월 18일 주일 육군무관 사모일로프는 알렉세예프 앞으로, 주일 해군무관 루신은 12월 20일 해군성에 보고했다. 알렉세예프 앞으로는 주한 공사 파블로프가 보낸 한층 더 심각한 편지가 도착해 있다. “러일교섭은 평화적인 결말에 이를 기회가 전혀 없으며 가장 가까운 장래에 군사적 행동이 개시될 것이라고 한다”는 소문이다. 한편 러시아 황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낙관적이었다. 황제는 조선의 상륙작전 가능성을 알려온 로젠의 전보에 대해서 “일본군의 조선 상륙은 러시아에 대한 도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공격은 짐이 보기에는 말도 안된다”고 했다. (너무나 한심한 지도자이도다!)
러시아의 12월 특별협의회
러시아 정부의 각료들도 러일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 감지하고 있었다. ‘신노선’도 일본의 공세를 억지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저자세의 육군상은 항복과도 같은 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12월 7일 쿠로파트킨은 10월 의견서를 수정해, 뤼순을 포함한 관둥주를 청국에 반환하고 남만주철도를 이 나라에 매각하는 것과 맞바꾸어 북만주를 병합한다는 안을 황제에게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일본과의 전쟁을 막는 안으로써 구상된 것이다. 쿠로파트킨은 결정적인 1903년이라는 해의 절반 가까이 페테르부르크의 육군성 집무실을 비워두고 있었다. 전쟁에 대비해 군대를 준비하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결국 마지막에 내놓은 것이 바로 이 평론가연 하는 뤼순, 다롄 그리고 남만주 포기론이었다. 황제는 “전쟁은 무조건 불가능하다. 시간이 러시아의 최선의 동맹자다. 해가 지날수록 우리는 강해질 것이다”라며, 그러니까 지금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존엄을 지켜나가면서도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며, 일본의 요구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하는 것을 러시아가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지금까지 러시아의 평화주의를 교묘히 이용해 점점 난폭한 요구를 내놓고 있었다. 아바자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는 것은 러시아에게 해(害)가 되지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러시아의 승인 없는 일본의 보호국은 우리에게 유익하다”며, “동방의 평화를 지키는 데에는 힘의 행사가 아니라 힘의 프레젠스(presence, 존재감)가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 러시아 사람 맞는지 의심스럽다. 정신 나간 얼간이들이라고 감히 얘기하고 싶다)
일본, 대러 작전계획을 결정하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1903년 12월 마침내 대러 작전계획을 완성했다. 제1기 작전은 ‘압록강 이남의 작전’과 이어 제2기 작전 ‘압록강 이북 만주의 작전’을 행한다고 되어 있다. 해군도 준비하고 있다. 12월 28일에는 제1함대와 제2함대로 전시편제의 연합함대가 편성되었다. 연함함대 사령관에는 도고 헤이하치로가 임명되었다. 해가 바뀌어 메이지 37년, 즉 1904년 1월 3일에도 합동 협의가 진행되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완벽한 사전 준비가 완성된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상호인식
1903년에 출간된 『해 뜨는 나라에서』 저자 데볼란은 표트르 시대에 러시아로 온 네덜란드인 해군장교의 후예이며 일본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다. 503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대부분 일본 여행기다. 데볼란은 일본의 특징을 ‘몰(沒)개인성’이라 보았다. 일본 지도자들은 유럽인에 저항하는 것은 무리라고 깨닫고, ‘자기의 독립과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서 유럽 문명의 강점 전부를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에 획득하는 것’을 지향했다. 자기들 나라가 탐욕스러운 유럽인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노보에 브레미야』지의 사주 겸 주필 사보린은 12월 1일 칼럼에서 “러시아 대국의 비극은 스스로의 위신에 상처를 주지 않고서는 후퇴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고 했다. 러시아 전체가 조용히 러일의 이 분쟁을 지켜보고 있을 뿐 전쟁을 믿지도 않고, 전쟁을 바라지도 않고 있다. 종합잡지 『러시아의 부』의 국제문제평론가 유자코프는 11월호의 정치칼럼에서 “아무튼 전쟁은 러시아에게나 일본에게나 ‘사활적인 이익이 위기에 직면했을 경우에만 정당화할 수 있다”고 했다. 사활적 이익이란 식민 공간, 바다로의 출구, 트렌스-아시아 철도의 확보 등 세 가지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1903년 12월에 나온 하야마 만지로의 『러시아』는 예외적인 책이었다. 출판사 후잔보의 ‘세계대관 시리즈’ 제1권으로 출간되었다. 러시아를 ‘모순’이라는 카테고리로 이해하려고 했다. ‘토지의 단조로움과 계절의 변화’, ‘인종의 복잡성과 국민의 통일’, ‘정치의 전제와 종교의 공화(共和)’, ‘인민의 복종과 허무당’, ‘실험주의와 신비주의’라는 다섯 가지를 들어 모순덩어리로서의 러시아를 관찰했다.
러시아의 제3차 서한
1903년 12월 29일의 협의회, 황제.알렉세예프.로젠의 각각의 생각, 12월 31일 람스도르프의 초안 작성, 1904년 1월 2일 ‘람스도르프의 새로운 제안’, 전보 완성, 전보안 및 편지 황제에게 보냄, 편지를 받은 니콜라이 2세 “교섭을 계속하는 것은 러시아의 평화지향 그리고 미친 일본과도 어떻게든 협정에 도달하고자 한다는 러시아의 원망(願望)을 명확하게 알려줄 것이다”라고 회답했다. 람스도르프는 1월 4일에는 로젠의 하루 전 전보에 반응해 다시금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외상은 극동 정세에 대한 로젠의 평가를 비판하고, 황제의 지시대로 알렉세예프에게 전보를 쳤다. 그리고 또 알렉세예프는 1월 3일 자 아바자의 전보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1월 6일 알렉세예프는 외상이 보내온 회답안을 그대로 도쿄로 보냈다. 로젠 공사는 그날 중으로 러시아의 제3차 제안을 고무라 외상에게 전했다.
러시아의 제3차 제안(1904년 1월 6일)
제1조 한(韓)제국의 독립 및 영토보존을 존중한다는 것을 상호 약속할 것. 제2조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승인하고, 더불어 한제국의 행정을 개량할 조언과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 일본의 권리임을 승인할 것. 제3조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공업적. 상업적 활동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들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할 것. 제4조 러시아는 앞 조항에 삽입된 목적 또는 국제분쟁을 일으킬만한 반란 또는 소요를 진압할 목적으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일본의 권리임을 승인할 것. 제5조 한국 영토의 일부라도 군사 전략상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조선해협의 자유 항해를 박해할 수 있는 군사 요새 공사를 한국 연안에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호약속할 것. 제6조 한국 영토에서 북위 39도선 이북에 있는 부분은 중립지대로 간주하고, 양 제국 어느 쪽도 여기에 군대를 투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호 약속할 것. 제7조 금후 한국의 철도 및 동청철도가 압록강까지 연장되기에 이르면, 해당 양 철도의 연결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호 약속할 것. 제8조 본 협약은 한국에 관해 종전에 일러 양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협정을 대체할 것.
상기의 조건에 동의함에 있어서 러시아 정부는 하기의 취지 1개 조를 본안 협약 안에 삽입할 것을 승낙해야 한다. 즉, 일본은 만주 및 그 연안은 완전히 일본의 이익 범위 밖임을 승인할 것. 동시에 러시아는 만주의 구역 내에 일본 또는 타국이 청국과 맺은 현행 조약 하에서 획득한 권리와 특권(단 거류지 설정을 제외한다)을 향유하는 것을 저해하지 않을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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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전야(前夜)
뤼순의 긴장
일본군의 조선 출병을 알리는 전보를 잇달아 받은 알렉세예프는 긴장했다. 1904년 1월 6일 그는 이 정보들을 수도의 극동위원회 사무국장 아바자에게 타전했다. 파블로프 공사(한국)도 탄식하면서 “일본은 상륙하기 전에 한국의 궁중 소요를 연출할 것이다. 그 작업은 서울에 있는 일본 수비대로 충분하다”며, “현재 내가 무엇보다도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 공사관으로 황제가 도망쳐 들어올 가능성이다”고 했다. 고종은 미국 공사에게도 부탁하려고 했다. 고종황제의 움직임은 당연히 일본 공사의 관심의 표적이었다. 알렉세예프는 “1. 극동의 여러 주와 시베리아의 여러 현에서 동원을 선언하고 만주에는 계엄령을 실시해 압록강 하류를 점령한다. 2. 극동군의 증원을 위해 예정되어 있는 제10군단, 제17군단을 이르쿠츠크로 수송 개시하고, 그 밖의 증원부대 동원을 준비하여 만주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요새에 경계령을 내리고 굳건한 방비를 완료한다”고 했다.
황제와 육군상은 망설이다
1월 6일 이날은 러시아력으로 12월 24일 크리스마스였다. 황제는 하루 종일 크리스마스 행사로 분주했다. 1월 12일 쿠로파트킨은 1월 6일 자 알렉세예프 전보에 관해서 황제에게 상주해 황제의 결정을 얻었고, 그 명령을 전하는 전보를 같은 날 알렉세예프에게 보냈다. 조선 국경으로 부대를 파견하는 일은 준비만 하라는 내용이었다. “국경에서는 어떤 작은 충돌이라도 발생하지 않도록 만반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충돌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황제나 쿠로파트킨 모두 러시아의 대항 조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죽도록 두려워하고 있었다. 요컨대 페테르부르크는 알렉세예프의 제안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즈음 알렉세예프는 위험인물(호전적)로 간주되어 있었다. 해군의 제2인자가 육군의 우두머리에게 최전선 함대를 남의 이야기하듯 비난하는 것은 정말로 추태의 극치였다.
가는 해, 오는 해
서력 1월 13일은 러시아력으로 12월 31일에 해당한다. 러시아로서는 불안에 찬 1903년이 끝나고, 운명적인 전쟁의 해, 1904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날 황제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평화였다. 이런 딴 세상 사람 밑에 베조브라조프, 알렉세예프, 람스도르프, 쿠로파트킨 등은 남의 나라 사람처럼 제각각 놀고 있었다. 베조브라조프는 일본과의 전쟁을 깊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크게 방향전환을 해 과감하게 전쟁을 회피할 생각으로 고안한 것이 러일동맹 안이었다. 1월 10일 베조브라조프의 러일동맹에 관한 의견서가 완성되었다. 결론적으로 베조브라조프는 “평화는 실로 조정된 이해를 기초로 한 정말로 성실한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에 의해서만 창출할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라고 했다.
일본정부, 개전을 포함한 최종회답을 결정하다
베조브라조프의 러일동맹 안이 전해졌을 때, 일본 정부는 최종회답을 결정하려 하고 있었다. 1904년 1월 8일 고무라는 회답안 및 의견을 가지고 가쓰라의 사저를 찾아가, 야마모토 곤베에 해군상,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상을 불러 협의했다. 모두 고무라의 원안에 찬성했다. 11일에는 다섯 원로들, 고다마 참모차장, 이토 군령부장, 이슈인 군령부차장이 총리대신 관사에 모여 고무라의 원안을 승인했다. 다음 날 12일 어전회의에서도 고무라의 원안을 결정했다. 이렇게 결정된 고무라의 회답안은 러시아의 회답이 나오든, 나오지 않든 교섭을 결렬시키고 개전할 것을 원했다고 할 수 있다. 1월 13일 일본의 최종 제안이 러시아에 전달되었다. “만주 및 그 연안은 일본의 이익 범위 밖이라는 점을 일본이 승인할 것. 러시아는 한국 및 그 연안이 러시아의 이익 범위 밖이라는 점을 승인할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중립선언
한국 황제는 중립선언 선포를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1월 18일 파블로프 공사는 외상 앞으로 타전했다. “조선이 러일의 충돌 시 중립을 지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전보를 즈푸의 프랑스 영사를 통해서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들에 보내는 것이었다. 파블로프는, 고종황제가 이 조치를 취하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서 조선 정부를 속박하고 보호 국화와 동맹을 강요하는 일본과의 협정 조인의 길을 차단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1월 21일 즈푸에 있는 프랑스 영사의 주선으로 세계 주요국가에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이 송부됐다. 한편 한국의 중립선언 소식은 일본 국내에도 전해졌다. 『도쿄아사히신문』은 1월 24일 자에 ‘조선 중립의 진상’이라는 기사를 게재, “요컨대 이번 중립선언은 전적으로 러시아파가 러시아의 뜻을 받아들여 가겠다고 말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 출병은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궤변이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장관협의
1904년 1월 28일, 알렉세예프의 제안에 따른 특별협의회가 열렸다. 황제는 참석치 않고, 알렉세이 대공이 주재했고, 쿠로파트킨 육군상, 람스도르프 외상, 아벨란 해군상, 아바자 극동특별위원회 사무국장이 참석했다. 알렉세이 대공은 “현재 일본의 여론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과의 무력충돌을 회피하고자 하는 우리의 원망(願望)을 고려해, 우리가 위대한 평화주의에서 한층 더 양보하는 데 동의하는 것, 즉 조선 전부를 일본에 줄 수 있는지, 아니면 여하한 경우에도 그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완전하고도 명확한 입장을 고수해야 하는지, 방향을 최종적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며, “조선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지킬 수 없다면 교섭하는 보람이 없다. ‘평화애호’라는 말로 정당화하면서 일본에게 전 조선을 줘버리면 된다”고 발언했다. 마지막으로 람스도르프가 “시간을 벌기 위해서 평화적인 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준비해 두었던 러시아의 회답안을 배부했다.
루코야노프는 이 협의회의 인상에 관해서, “관료 상층부에 국가이성의 면에서는 물론 정치적인 의지의 면에서도 독특한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람스도르프를 포함한 러시아 정부의 장관들은 하나같이 이 위기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함량 미달의 지도자로 보면 된다.협의회에서의 알렉세예프와 람스도르프의 판단
“군사충돌을 뒤로 미룰 수는 있지만 없앨 수는 없다” 알렉세예프의 정세판단은 정확했다. 그러나 람스도르프는 그 판단에 따르지 않고, 어디까지나 양보함으로써 일본과의 전쟁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람스도르프는 알렉세예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태수는, “조선에서 양보함으로써 만주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일본과 교섭했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확립하고 나서 일본과의 교섭에 임해야 했다. 상황 평가의 면에서는 알렉세예프 쪽이 현실적이었다. 람스도르프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것은 자기기만이었다. 그러나 황제도 그리고 장관들도 모두 외상과 같은 생각이었다.
N, 사모키시, 화집 『전쟁 1904-1905년-화가의 일기에서』에 수록, 1908, 상트페테르부르크(출처 : 한길사 제공)일본, 각의에서 국교단절을 결정하다
일본에서는 이미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개전의 때를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2월 1일 오야마 이와오 참모총장은 메이지 천황에게 사태를 보고 개전의 결단을 제안했다. 가쓰라 수상은 이 오야마 의견서를 받고, 2월 3일 이토, 야마가타, 오야마, 마쓰카타, 이노우에 등 원로 다섯 명 및 외무와 육해군 대신 세 명과 총리대신 관사에서 회합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내고 자유행동에 나설 것을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가쓰라와 고무라는 천황을 알현하고 다음 날 2월 4일 오후 1시에 개전을 결정하는 어전회의를 열 것을 청원했다. 3일 오후 4시 반, 고무라 외상은 구리노 공사에게 더는 러시아에 회답을 독촉할 필요가 없다고 연락했다. 바로 이날 2월 3일, 뤼순항에서는 오전 5시부터 순양함 ‘아스콜드’를 선두로 전함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모든 전함 6척과 순양함 6척이 스트라크 중장의 지휘하에 잇달아 출항했다. 2월 4일 오전 10시 30분부터 각의가 개최되어 개전이 결정됐다. “러시아 정부는 말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아직 아무런 회답도 보내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표면상으로는 평화적인 태도를 가장하면서 몰래 만주에서 군사적 준비를 엄중히 하고 있다. 이제 제국의 기득권 및 정당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독립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러시아 정부에 통고함과 동시에 긴급히 군사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고문도 결정됐다. 거기에는 일본 정부는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이 자국의 강녕과 안전을 위해 긴요 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에 상처를 입히는 행동을 취하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계속해서 이날 오후 2시 25분 어전회의가 열렸고, 내각의 상주 방침을 오늘날의 상황과 정세의 면에서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믿으며 승인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대러 개전이 결정됐다. 대러 단교를 통고하고 군사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후 4시 35분, 회의는 끝났다. 이 어전회의가 끝난 뒤 육군 제1군에 동원령이 내려졌다.
러시아 외상과 현지의 최고사령관의 최후 몸짓
이때 러시아에서 외상은 여전히 대일 회답을 취합, 정리하느라 부심하고 있었다. 육군상 쿠로파트킨은 이날 “코멘트할 게 없다”고 했고, 아바자의 의견은 람스도르프안보다도 양보적이었다. 그러나 최후에 제멋대로 말을 꺼낸 것은 황제였다. 황제의 무책임한 변덕으로 대단한 람스도르프도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특별비밀조항’ ‘중립지대조항’에 대해, “중립지대에 관한 제6조를 포기한다고 회답하기 전에 비밀조항으로 중립지대를 설정한다”는 교섭을 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날 밤 얼빠진 황제는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보러 갔다. 중립지대 조항을 뺀다고 해도 전략적 이용금지 조항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일본은 전쟁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봤자 어차피 헛된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 그 순간에, 현지의 최고사령관 직에 취임하기로 예정된 인간 알렉세예프가 그 직을 사퇴하겠다고 청원한 것은 그 인물이 군인으로서 지닌 무자각과 무책임 그리고 낭패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전보를 받은 황제도 당혹했다. 알렉세예프는 2월 7일에도 여전히 아바자에게 교체를 청하는 전보를 쳤다.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정신 상태는 아니었다.
일본의 단교 통보와 일본군 전투 행동을 개시하다
개전을 결정한 일본 정부는 선전포고하는 대신 국교단절을 통고하기로 했다. 2월 5일 오후 2시, 고무라 외상은 구리노 공사에게 교섭 단절, 국교단절의 통고에 관한 전보 네 통을 보냈다. 이날은 러시아 황제의 ‘이름의 날’로서 에르미타주 극장으로 외교관들을 초대해 콘서트를 열었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난맥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월 4일 밤, 일본의 육해군 수뇌부는 군사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개전의 군사전략이 결정되었다. 국교단절을 하고 선전포고하기 전에 연합함대가 뤼순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야마모토 곤베에 해군대신, 이토 스케요키 군령부장, 이슈인 군령부 차장은 참내했다. 야마모토는 “개전의 호기, 오늘에 있다”고 상주하고, 명령안을 제출해 재가를 받았다.
육군성에서는 이날 밤, 임시 한국파견대, 즉 제12사단 소속 제23여단 2,240명에 대한 승선 명령을 내렸다. 1. 연합함대 사령관 및 제3함대 사령관은 동양에 있는 러시아 함대의 전멸을 도모할 것. 2. 연합함대 사령관은 신속하게 발진하고, 우선 황해 방면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격파할 것. 3. 제3함대 사령관은 신속하게 진해만을 점령하고, 우선 조선해협을 경계할 것. 여단장 기고시 야스쓰나에게는 인천에 상륙하고, “인천 상륙 후에는 신속하게 경성으로 진입해, 이 지역의 점령을 확실하게 유지할 것을 임무로 한다”는 훈령이 보내졌다.“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노보에 브레미야>의 사주 겸 주필 수보린이 2월 5일 자 칼럼에서 쓴 문장은 러시아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두가 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백 번이나 되풀이해 말했다. 외국의 신문들이 러시아는 할 수 있는 만큼의 양보를 했다. 그러니까 일본이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전쟁을 위한 전쟁을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써준 것에 우리는 기뻐하고 있다. 이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상한 놈이다. 결국 러시아가 평화를 원한다고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헛수고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극이다. 공포와 유혈로 가득 찬 특별한 힘의 고양과 특별한 열광으로 가득 찬 비극이다. 러시아는 약하다. 러시아는 동란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러시아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며, “우리는 저 땅, 즉 극동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사활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는가? 여기에 진지한 답을 내놓아야만 한다. 명예심이든 국민적 자랑거리든, 바보와 현자 할 것 없이 우리에게 퍼붓는 모욕이든, 곧 사라질 그리고 하찮은 것이 우리의 지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냉정한 태도로 그리고 모든 것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이성과 투쟁할만한 목적-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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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개전
1904(메이지37)년 2월 6일(토요일)
1. 도쿄 : 이날 각 신문은 ‘외국전보 암호 금지’ 소식을 보도했다. 『도쿄아사히신문』은 ‘동양에 있는 각국 군함 소재지’를 보도하면서, 특히 러시아의 함선을 항구별로 모두 뽑아 써 놓았다. 인천에는 ‘바랴그’, ‘코레예츠’의 두 함선이 있었다. 우리가 ‘강도’ 러시아에 ‘강제적 간섭의 수단’을 취하라고 주장해왔는데도, 정부는 오랜 기간 협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의 어전회의에서 마침내 위험에서 벗어난 다른 방법을 취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며, 러시아의 해군 주재 무관 루신은 이날 일본 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는 것에 관해, 러시아어 불과 세 단어로 된 전보를 재빨리 뤼순으로 타전했다. “총동원 루신” 이것이 러시아의 주일 무관이 타전한 마지막 전보였다.
2. 사세보 : 오전 9시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함대의 제3전대가 사세보항에서 출격했다. 오전 11시에는 제2전대가, 정오에는 제1전대가 뒤를 이었다. 연합함대 사령관에게 내려진 명령은 “신속하게 발진해 우선 황해 방면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라”는 것이었다. 목표는 뤼순이었다. 마지막은 오후 2시에 출격한 우류 소토키치 소장이 이끄는 제4전대로 인천을 목표로 했다. 전광석화 같은 작전 조치들이다
3. 저녁 무렵인 오후 4시. 고무라 외상은 로젠 공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외교 관계 단절을 통고했다. 로젠이 공사관으로 돌아오자 해군 무관 루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두 사람은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던 것이다.
4. 진해만 : 일본 해군은 오랫동안 여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곳 진해만은 해군의 근거지로 넓은 만은 절호의 장소였다. 2월 6일 저녁 무렵, 마산포에 일본군 대군이 상륙해 조선의 전신국을 점거했다. 이렇게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진해만 점령과 부산 및 마산의 전신국 제압이 러일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에서 최초로 수행된 군사행동이었으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주권과 영토에 대한 침략행위였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의 전사에서는 거의 완전하게 무시되어왔다.
5. 페테르부르크 : 페테르부르크 시각으로 오후 4시, 일본 시각으로는 오후 11시 구라노 공사는 람스도르프 외상을 방문해서 일러 교섭의 단절을 통지하고 독립행동의 권리를 주장하는 통고문 및 외교 관계의 단절, 외교 대표의 철수를 통지하는 통고문 2통을 수교했다. 요컨대 국교단절의 통고였다. 이날 밤 구리노 일본 공사는 람스도르프 외상 앞으로 개인적인 편지를 보냈다. “…저는 귀국의 수도에 체재했던 전 기간 각하와의 관계에서 각하가 보여주신 진지한 우정과 친목적인 공감의 감정의 감정에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람스도르프는 이 전보에서, 일본이 “독립행동을 취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통고해온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람스도르프가 저지른 가장 큰 죄였다.
2월 7일(일요일)
1. 도쿄: 각 신문은 고무라 외상이 러시아에 교섭 단절, 외교 관계 단절을 통고한 데 대한 보도를 일절 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로젠 공사가 도쿄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만을 보도한 것도 동곡이곡이었다.
2. 뤼순: 이날까지도 극동태수 알렉세예프는 사임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맹세하건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904년 2월 8일(월요일)
1. 도쿄 : 이날의 각 신문도 로젠 공사의 철수에 대해서 구리노 공사의 철수를 보도했지만, 일본이 외교 관계 단절을 통고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숨기고 있었다.
2. 서울 : 하야시 공사는 고종의 프랑스 공사관 파천 정보에 대해 ‘차제에 특히 폐하(고종)에게 강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야시는 추측을 전제로 ‘우리 정부가 곧 자유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3. 뤼순 : 2월 6일부터 일본인의 뤼순 탈출은 이날 절정에 달했다. 일본 상점들은 모두 상품을 덤핑 판매하고 가게를 닫고 있었다. 즈프의 일본 영사 미즈노 고키치가 와서 뤼순의 일본인 전원의 퇴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일본 영사가 온 것이 국교단절이 곧 전쟁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되었고, 알렉세예프는 부하에게 미즈노 영사에게 협력하라고 지시했다. 오후 4시경, 영사는 남아 있던 모든 일본인을 데리고 뤼순에 관한 최신정보와 함께 영국 배를 타고 떠났다.
4. 페테르부르크 : 참모총장 사하로프는 이날 아침 10시에 의견서를 육군상에게 제출했다. 사하로프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면 ‘우리에 대한 최초의 적대적 행동’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러시아는 그에 대응하는 군사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하로프는 러시아가 행동하면 일본의 행동을 지연시키게 될 것이고 그것이 러시아에게 필요한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전 중에 니콜라이 2세 주재하에 협의회가 열렸다. 출석한 사람은 알렉세이 대공과 아벨란 해군상, 쿠로파트킨 육군상, 람스도르프 외상이었고, 아바자는 기록담당이었다. 쿠로파트킨, 람스도르프, 해군총재 알렉세이 대공 등은 또다시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해야 한다며, 즉 전쟁을 회피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요는 전쟁을 회피하자는 것이었다. 러시아 쪽에서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사태를 우려하고 있던 군인도 있었다. 크론슈타트 군항 사령관 마카로프 중장은 이날 해군장관 아벨란에게 건의서를 보내면서, “선전 포고 전에 선제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해군장관도 군령부장도 이를 듣지 않았다. 경고 자체도 이미 한발 늦은 것이었다.
5. 도쿄 : 오후 8시 고무라 외상은 대신 관저로 신문 기자들을 불러, “드디어 제국이 그 존망을 걸고 활동을 시도해야만 하는 시기를 맞이했다”고 알리고, ‘일러 교섭 파열의 전말’을 발표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만주를 점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경 지역에서 감히 침략적 행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만주를 러시아가 병탄하게 된다면, 한국의 독립은 지탱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제국 정부는 실로 충심으로 평화를 절실히 염원하기 때문에 은인자중하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러시아의 행동 때문에 결국 제국 정부는 타협의 희망을 잃고 담판을 단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 뤼순 : 도고 사령관이 이끄는 일본의 연합함대 주력은 2월 8일 오후 5시에 뤼순항 바깥 동쪽 44해리에 있는 위안다오 부근에 도착했다. 거기서 곧바로 제1, 제2, 제3 구축대의 구축함들이 뤼순을 향해 발진했다. 제4구축대는 다롄으로 향했다. 이때 뤼순항 밖의 외부 정박지에 뤼순항 소속 러시아의 전함선이 정박해 있었다. 함대 사령관 스파르크와 참모장 비트게프트는 전쟁은 없을 것이다고 했지만 2월 8일 오후 11시 30분, 일본 측 구축함은 뤼순항 외부 정박지의 러시아 함선들에 대해서 어뢰 공격을 개시했다. 우선 전함 ‘레트비잔’의 함수 좌측에 명중해 심각한 손상(사망자 5명)을 입었다. 또 전함 ‘쩨사레비치’(사망자 1명), 순양함 ‘팔라다’(사망자 7명)은 서쪽 해안에서 좌초했다.
7. 페테르부르크 : 이날 밤 8시부터 황제는 다르고미슈스키의 오페라 ‘루살카’를 보고 있었다. 오후 11시 뤼순의 알렉세예프로부터 긴급 전보가 와 있었다.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뤼순의 3척이 대파되었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개전의 정보가 육군성과 해군성으로는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서야 전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노보에 브레미야』에 제1보가 들어왔을 때, 필렌코는 주필 수보린의 방에 있었다. 전보를 읽은 수보린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숨이 막힌 듯이 넥타이를 풀었다. 얼굴은 새파래졌고, 손은 떨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뇌빈혈을 일으킨 것이다. 의식을 되찾은 수보린은 외쳤다. “러시아는 끝났다. 러시아는 끝장이다.”
2월 9일(화요일)
1. 뤼순 : “보는 그대로다. 어떤 오해가, 저쪽에 있었단 말인가? 적어도 지금은 폐하께서도 그동안 속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을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말해왔다. 전쟁 가능성을 직시해야 하며, 평화적인 출구를 기대하며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만일 이 점이 처음부터 확립되어 있었다면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이 꼴이라니!”라며 알렉세예프는 절규했다. 오전 8시 일본의 연합함대가 뤼순으로 접근했다. 러시아 함대 ‘아스콜드’와 ‘바얀’이 공격당해, ‘아스콜드’는 사망자 4명, 부상 10명, ‘바얀’은 사망자 4명, 중상자 2명, 부상 수병 35명이 발생했다.
2. 페테르부르크 : 『노보에 브레미야』 논설에는 ‘조선의 독립’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조선의 독립이 잊어서는 안 될 기본문제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본질적으로 단순한 문제를 이리도 길게, 이리도 체계적으로 혼란시켜 왔다”고 했고, 러시아는 일본에 조선에서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해왔지만, 모든 점에서 조선이 독립국가로서 유지된다는 것이 상정되어 있었다. ‘조선의 독립’은 모든 교섭의 기본 전제로 상징되어 있었다. 작년 8월부터 시작된 러일 간 교섭은 우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일본의 사회단체와 내외 언론기관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일본인들 사이에 호전적인 흥분상태를 불러일으켰고, 러시아와 군사전투를 치르는 쪽으로 정부를 몰아세웠다. 그러한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도쿄의 내각은 교섭에서 점차 욕심을 부리게 되었고, 동시에 나라를 전투태세에 두기 위해서 대대적인 방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2월 10일(수요일)
1. 도쿄 : 이날 저녁, 일본 정부도 선전(宣戰)의 조칙을 고표했다. 이것은 심야에 『관보』의 호외로 시중에 배포됐다. “짐은 여기에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노라. 짐의 육해군은 부디 전력을 다해 러시아와 교전에 종사해야 할 것이며, 짐의 모든 신료와 관리들은 각각 그 직무에 따라 그 권능에 잘 부응하여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주가 러시아의 영유가 되어 버린다면 한국을 보전할 수 없으며, 극동의 평화 역시 애초부터 바랄 수가 없다. 러시아는 이미 제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한국의 안전은 이제 다시 위급하게 되었으며, 제국의 국익은 침박당하려 하고 있다. 사태가 이미 이에 이르러 제국이 평화 교섭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장래의 보장은 이제 싸움터에서 이를 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짐은 그대들의 충성과 무용에 의지해 신속하게 평화를 영원히 극복함으로써 제국의 광영을 보전할 것을 기대하노라”는 내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전의 조칙은 일본의 전쟁 목적을 위장한 문서였다. 일본은 이 조칙을 영어로 번역해 각국 정부에 송부했다. 청조 정부에게도 보냈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선전포고를 보여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는지 보내지 않았다.
2월 11일(목요일)
1. 쓰가루해협 :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본거지로 하는 러시아의 순양함 4척(‘바가티리’ ‘류리크’ ‘그로모보이’ ‘러시아’)이 쓰가루해협\ 방면으로 진출해, 오후 1시 사카타에서 오타루로 향하는 상선을 아오모리현 헤나시자키 앞바다에서 포격했다.
2월 13일(토요일)
1. 도쿄 : 『도쿄아사히신문』은 사설 ‘제국 해군의 성적’과 ‘적의 포학함’을 게재했다. ‘뤼순해전’의 자랑과 일본해(동해)에서의 ‘러시아 순양함 4척의 일본 상선 격침’의 비난을 실었다. “일개 상선을 쫓아다니며 이를 격침하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짓인가? 문명 세계의 공법도 모른다는 것인가? 그 죄는 침략 그 이상이다”라며 비난했다.
2. 서울 : 이날 『황성신문』은 ‘일러 교섭 전말 대요’로서 8일의 고무라 외상의 교섭 경과 설명을 보도했다. 코멘트는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 이날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은 하야시 공사를 찾아 차제에 전부터 교환을 연기했던 밀약을 교환하고 싶다고 자청했다. 일본의 뜻을 살피던 친일파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야시 공사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의정서안을 제시했다. “제1조 일한 양 제국 사이에 항구불역의 친교를 보유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오로지 대일본제국 정부의 조언을 받아 내치와 외교의 개량을 도모할 것”(6개조). 운노 후쿠주는 개전 이전의 안에 비해서 일본에 대한 한국의 종속적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레벨의 차이가 있다고 보았는데, 결국 이 안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2월 14일(일요일)
1. 도쿄 : 『도쿄아사히신문』은 논설 ‘러시아의 선전 조칙’을 싣고, 두 가지를 비판했다. 첫 번째, 일러 교섭이 ‘한국의 사태’에 관한 것. 두 번째, 외교 관계의 단절을 통고한 것만으로 뤼순을 습격한 것. 또한, 고종의 칙어 왜곡이다. 한편 고토구 슈스이 등의 주간지 『헤이민신문』은 이날 발행한 제14호에서 ‘전쟁의 도래’라는 논설을 게재했다. 이쪽은 완전히 고립된 목소리였다. “전쟁은 마침내 왔다. 평화는 교란되었다. 죄악은 횡행 되었다”로 시작해서 양국 정부는 상대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평화 교란의 책임은 양국 정부, 또는 그 어느 한 국가의 정부가 이미 짊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평민들은 이와 함께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아, 우리 평민들은 어디까지나 도저히 전쟁을 인정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입이 있고 붓이 있으며 신문이 있는 한,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절규해야 한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목소리였다.
2. 서울 : 고무라의 수정안을 다시 제시받은 한국의 각의는, 제1조의 ‘조력’을 거부하고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할 것이었다. 아무리 친일파라 해도 독립국의 면목을 잃고 싶지는 않다는 기분의 표현이었다. <도대체가 나라를 빼앗기는 실질적인 문서에 ‘조력’과 ‘충고’의 무슨 의미가 있는가>
2월 23일(화요일)
1. 서울 : 이날 아침, 하야시 공사는 이지용 외부대신 대리의 집으로 공사관을 파견해, 도주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했고, 정오에 본인과 면회했다. 이지용은 하야시의 설득에 끝내 굴복해 오후에 하야시 공사와 함께 한일의정서에 조인했다.
한일의정서(6개조)
<전문 생략>
제1조 : 일한 양 제국 사이에 항구불역의 친교를 간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신하고, 시정의 개선에 관해서 그 충고를 용인할 것. 제2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대한제국의 황실을 안전하고, 강녕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 및 영토보존을 확실하게 보증할 것
일본은 중립을 선언한 한국을 침입했고, 진해만과 서울, 인천 지역, 나아가 평양을 점령했으며, 그 점령군의 압력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굴복시켜 일본의 보호국으로 향해 가는 단서가 될 의정서에 조인하도록 했다. 군사력에 의한 강제에 기초한 체결이었다.
※ 본 책은 이후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기술하고 있으나, 핵심 내용은 없다. 이렇게 조선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다. 분탄의 마음을 털어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유럽의 제국주의의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일본의 야욕은 그 시작을 세계에 표방한 것이었다. 런던발 기사는 전적으로 일본의 정당성, 당위성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