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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평가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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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효정 기자(뉴스웨이 생활경제부 유통·바이오팀)
감정평가사처럼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직군도 AI 변화의 한가운데 있다. 최근 금융권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도입된 자동평가시스템(AVM)은 주택 등 표준화된 자산 평가에서 감정평가사의 역할을 일부 대체하고 있다. AVM은 과거 실거래가, 지역 개발 계획, 건축 연한 등을 종합해 예상 가치를 산출하는
알고리즘으로, 속도와 일관성 면에서 인간을 앞선다. 특히 단독주택이나 아파트처럼 구조가 단순한 자산일수록 자동화 속도는 빠르다. 부동산 플랫폼 기업들은 자체 AI 평가 시스템을 고도화하며 기존 감정평가 업무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술이 감정평가사의 전면적 대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실제 현장에서는 감정평가가 단순히 수치를 내는 작업이 아니라, 법적 분쟁이나 토지 수용, 기업 회계와 같은 복잡한 맥락을 수반한다. 감정평가사는 단순 수치 이상의 해석과 정황 판단을 요구받는다. 특히 수용재결, 상속 분쟁,
국제회계기준(IFRS) 적용 등에서는 자산의 법적 지위나 경계, 권리관계에 대한 고도의 해석이 필요하다. 기술의 도입은 감정평가사의 ‘일’을 뺏는 것이 아니라, ‘일의 방식’을 재편한다. 진짜 위협은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과거 방식에만 머무는 전문가의 태도일 수 있다. 살아남는
전문가는 기술을 배제한 사람이 아니라, 기술을 해석하고 다루는 사람이다.
AI가 집어삼킨 신입(entry-level job)··· 누가 살아남는가
한때 ‘기술은 일자리를 늘린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산업혁명도, 컴퓨터의 확산도 결국 새로운 직무를 창출했고, 인간의 노동은 늘 적응해왔다. 미국에서는 1850년 농업 종사자 비중이 60%에 달했지만 1970년에는 5%도 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산업과 직군이 태어났고 고용률은 오히려 상승했다. 하지만
지금, 인공지능이라는 기술 앞에서 그 오래된 낙관은 흔들리고 있다. AI는 단순히 ‘효율화’를 넘어, 사람을 업무에서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수많은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는, 숫자보다 얼굴을 통해 더 또렷이 보인다.
한국의 청년들은 점점 ‘입구’ 자체를 잃어가고 있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2022년 이후 2년 반 동안 15~29세 청년 일자리는 약 21만 개가 사라졌고, 그중 98% 이상이 인공지능 자동화와 관련 있는 분야였다. 단순 반복직이 아니라, 출판, 프로그래밍, 정보서비스업 등 고학력 지식 기반
직군에서도
고용 축소가 뚜렷했다. 반면 같은 기간 50대 이상 고용은 20만 개 증가했다. 이른바 ‘막내 자리’가 사라졌다. 기업은 더 이상 사람에게 반복적 업무를 시키지 않는다. AI와 자동화 시스템이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고, 물류 흐름을 관리하며, 콘텐츠를 편집한다. 기존에는 초보자가 시작하던 직무가
사라지고,
바로 고숙련을 요구하는 중간 관리자만 남았다. 청년들은 ‘적응할 기회’조차 없이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기술이 만든 양극화,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문제는 단순히 일자리 수가 아니라 ‘분배’다. 미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AI로 인해 2030년까지 전 세계 제조업 일자리 200만 개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며, 미국 기업의 CEO들은 입을 모아 “AI가 수백만 명의 화이트칼라를 해고할 것”이라 경고한다. 특히 엔트리급
사무직의 절반이 위협받고 있으며, ‘화이트칼라 대량 해고(bloodbath)’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AI는 대개 직무 전체가 아니라 개별 업무 단위로 침투한다. 하지만 이미 업무는 잘게 쪼개져 있어, 일정량만 자동화돼도 사람의 자리는 빠르게 줄어든다. 실례로 최근 아마존은 인공지능(AI) 도입을 이유로
무려 1만 4,000명의 사무직 직원을 감원하기로 했다.
미국 1950년 센서스에 있던 271개 직업 중 완전히 사라진 건 엘리베이터 안내원 하나뿐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남아있는 직업’은 ‘남아있는 일자리’와 다르다.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이미 진행 중이다. AI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더 높은 연봉과 더 나은 업무로 이동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시장 바깥으로
밀려난다.
AI를 활용한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다 해도, 그 혜택은 제한적으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AI 개발자, 프롬프트 엔지니어, 데이터 관리자 등 신직군이 주목받고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높은 기술 장벽과 학습 비용을 수반한다. 반면 기존 직군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겐 그러한 전환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도
청년층이 AI 관련 학과로 몰리고 있지만, 전체 고등교육 구조는 여전히 전통 산업 중심이다. 학벌, 전공, 지역 격차는 기술 변화에 따른 양극화를 더 고착화시키고 있다.
새로운 일자리,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가
역설적으로, 기술 자체는 고용을 늘리기도 한다. 구글 수석이코노미스트 파비엔 커토에 따르면 컴퓨터 보급 이후 미국에서는 타자기 산업에서 350만 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대신 1,900만 개의 새 일자리가 생겼다. AI 역시 데이터센터 구축, 반도체 제조, 자율주행차 개발, 전력 인프라 확장 등 새로운
산업을 열고 있다. 맥킨지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AI 인프라 확장만으로도 향후 수십만 명의 전기공, 용접공, 설비기사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일자리로의 이동 경로가 없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자동전화 교환기 도입은 수많은 여성 전화교환원의 임금을 깎았고, 1980~90년대 제조업 자동화는 중서부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만들었다. 그때 정부는 ‘적응’을 강요했지만, 실제로는 다수의 노동자가 새 일자리를 찾지 못했고, 그 상처는 지금까지 지역 공동체에 남아있다.
AI 시대의 고용 전환은 단순히 직무교육이나 일자리 중개로 해결되지 않는다. 산업 구조 자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제조업이 기술 산업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지식, 경험, 문화 모두 달라진다.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것도 단순 기술 습득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과 업무 방식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는 지역 사회, 교육 기관, 기업, 정부가 긴밀히 협력하는 새로운 고용생태계 설계가 필요하다.
전문직의 생존 전략은 ‘기술의 파트너 되기’
감정평가사 사례에서 보듯, 전문직도 예외가 아니다. 의료, 법률, 회계, 교육 등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던 직업들도 AI의 지원 아래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미 미국에선 계약서 초안을 작성하는 AI, 교육과정 진단을 수행하는 AI가 널리 활용되고 있다. 회계사와 세무사는 자동화된 회계 처리 시스템과
경쟁하고, 의사는 영상 분석 AI와 협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는 전문직 종사자는 ‘기계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기계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다. AI를 설계하고, 점검하고, 그 결과를 해석하고 책임지는 역할이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기술이 단순화를 이끄는 만큼, 사람은 복잡한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
기술과 공존하려면 전문가도 변해야 한다. 감정평가사뿐 아니라, 의사·세무사·교사 같은 전문직 역시 ‘기계가 넘볼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으로 변화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디지털 기기를 익히는 수준이 아니다. 기술의 구조와 한계를 이해하고, 그 결과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판단력을 갖추는 일이다. 예컨대 감정평가사는 AVM이 산출한 수치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를 설명하고, 현장 정황을 종합해 판단을 보완해야 한다. 마치 회계사가 자동화 시스템을 이용하되, 그 보고서에 최종 서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전문가의 권위는 기술을 배제하는 데서가 아니라, 기술의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이 역할을 설계하지 않으면, 전문성마저도 ‘자동화 가능한 절차’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계약서 작성, 판례 검색, 소송 문서 초안 작성 등 단순·반복적인 법률 업무를 AI가 대체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Harvey’라는 이름의 법률 AI로, 글로벌 로펌들이 실제 업무에 도입해 변호사의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리고 있다. 이 AI는 수천 건의 판례와 법령을 기반으로 논리를
구성하고, 간단한 자문서까지 작성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신입 변호사들이 맡던 ‘문서 검토’ 업무의 비중이 줄어들고, 로펌 입사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변호사의 역할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복잡한 사건에서의 전략 수립, 법정 변론, 윤리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기술은
보조자이고, 판단과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는 전제가 흔들릴 때, 법률 서비스의 신뢰도도 함께 흔들릴 수 있다.
교육과 제도는 전환의 마중물이 될 수 있는가
AI는 인간에게 더 높은 기술을 요구하지만, 현실의 교육 시스템은 너무 느리고 멀다. 이미 대부분의 2030년대 노동력은 현재 일하는 중이다. 이들에게 “학교로 돌아가라”고 할 수 없다. 대신 일터에서 배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구글이 ‘Grow With Google’ 프로그램을 통해 단기
수료 기반 AI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있다. 경력 단절자, 비전공자도 참여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한국 역시 직업계고와 폴리텍, 전문대학을 중심으로 단기 집중형 부트캠프를 설계해, 기업과 연계된 실무형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단순 코딩 교육이 아니라, AI를 현장에서 안전하게 활용하고 운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입문 직무 자체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예컨대 AI 데이터 태깅 보조, 로봇 관제 및 장애 대응, 현장 안전감시 요원 등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할’ 자동화 영역을 발굴해야 한다. 그래야 청년들이 기술로 진입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자동화가 침투하기 어려운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의 현장
판단력, 돌발 대응, 윤리적 고려가 필요한 영역이다. 이 틈에서 새로운 ‘입구 직무’를 디자인해야 기술 발전과 고용의 공존이 가능하다.
기술의 방향보다, 우리가 설계할 구조가 더 중요하다
AI는 이미 멈출 수 없는 흐름이다. 효율은 오를 것이다. 생산성과 수익성도 함께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익이 극소수 기업에 집중되고, 노동시장이 양극화되고, 수많은 청년이 출발선조차 갖지 못한다면, 그 기술은 공존이 아니라 분열의 씨앗이 된다. 산업은 바뀌었지만, 사람은 여전히 준비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전환이다. 더 많은 전기공을 키우고, 더 많은 AI 오퍼레이터를 길러야 한다. 새로운 사다리를 설계하지 않는 한, 기술의 발전은 결국 누구도 오르지 못하는 절벽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