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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2

* 이 글은 배명부 감정평가사님(명품감정평가사사무소)께서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2」 책을 요약하여 기고한 글입니다.

  • 글. 배명부 감정평가사(명품감정평가사사무소)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2
  • 저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지음, 이웅현 옮김
  • 페이지 수 570쪽
  • 발간일 2019. 9. 23.
* 이 글은 배명부 감정평가사님(명품감정평가사사무소)께서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2」 책을 요약하여 기고한 글입니다.
이어가면서

2024년 「감정평가」 봄호에서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연구의 종합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름은 ‘러일전쟁’이고 내용은 ‘동아시아전쟁’이지만 본질은 ‘조선전쟁’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라고 기술하였다. 전호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완수한 결과, 일본은 1870년부터 조선출병론의 제안에 이어 줄기차게 침탈 야욕을 드러내었고,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에는 노골적인 조선점령 실행계획을 진행하면서 러시아와는 긴장 고조를 유발시켜 군사적인 우위를 빌미로 전쟁 준비의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러일전쟁 개전까지의 일본의 대러시아의 가식적인 교섭, 협상 과정과 그들의 개전의 불가피 성을 짚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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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의화단(義和團)사건과 러·청 전쟁

    의화단사건

    19세기 말 프랑스, 일본, 독일, 러시아, 영국이 잇달아 중국의 영토를 침략하면서, 청조 황제가 지배하는 노 제국은 그야말로 망국의 위기에 직면했다. 1900년 당시 격렬한 반항 운동이 폭발했다. 서양인의 종교와 문명을 적대시하는 의화단의 봉기였다. 이들의 슬로건은 ‘부청멸양’이었으며, 의화권이라는 무술을 연마한 집단이 봉기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청조 정부는 1월 4일 상유를 발하고 사건에 유감의 뜻을 표하는 한편 외국인 배척을 금지했다. 하지만 4월에 들어서자 사태는 급격하게 악화했다. 5월 중순이 되자 톈진과 베이징 지역에서 의화단의 소요가 본격화됐다. 6월 16일 시모어 장군을 사령관으로 국제부대는 베이징 바로 옆의 랑팡을 거점으로 하고, 17일 다구 포대를 점령했다. 이에 의화단의 폭력사태가 점점 정당화 받자, 6월 21일 마침내 ‘선전의 상유’를 발하기에 이르렀다. 다구 포대의 점령 후 톈진에서 연합군과 청국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7월 14일 톈진이 함락되었다.

    러청 전쟁의 개시

    한편 러시아도 7월 중반부터 말에 걸쳐서 6개 방면에서 일제히 만주로 침입했다. 7월 15일 청국군은 블라고베셴스크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했다. 청국군의 이 포격이 바로 만주 전쟁, 즉 러청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국경인 아무르강에 면한 도시 블라고베셴스크는 아무르주의 주도이다. 이 전투에서 ‘아무르의 유혈’이라 일컫는 청국군의 참패를 불러왔고, 이에 러시아군은 만주 전 지역으로 계속 진격하고 있었다. 한편 8월 6일 연합군은 베이징 공격을 개시하여 8월 19일 연합군은 마침내 베이징을 제압했다. 연합군으로서는 베이징 제압이 최종목표였지만, 러시아는 바야흐로 만주 전쟁, 즉 러청 전쟁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다. 9월은 러청 전쟁의 완성 국면에 접어들어 10월 2일, 청조의 성지 평톈은 러시아 알렉세예프에 의해 만주 전토가 러시아군의 제압 하에 들어갔다.

    의화단사건과 조선, 일본

    의화단사건이 발생하자 고종은 청국의 사태가 한국에 미칠 것을 경계했다. 열강이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 각종 요구를 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만한세력영역협정론’ 내지는 ‘만한교환론’이 공공연하게 대두된 것은 러시아군의 만주 점령 후에 나타난 일본의 새로운 주장이었다. 『도쿄아사히신문』은 7월 26일 자 논설로 ‘우리 일본과 조선반도’를 게재했다. 논설의 필자는 “조선반도는 7도 모두 사실상 일본의 세력범위가 되어 있다. 이를 두고 다른 자가 다툰다고 해서 그것을 용인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기고만장한 글이었다. 일본의 눈빛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러시아도 감지하고 있었다. 도쿄의 러시아 신임 공사 이즈볼스키는 일본 아오키 외상에게 조선에 대한 의구심을 표출하자, 아오키는 “조선으로 출병할 필요가 생기면 현행 협정에 따라 러시아와 즉시 상담하겠다. 반드시 러시아 부대와 일본 부대의 행동 지구를 나누자는 제안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속임수의 극치다.

    한국중립국안의 등장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우려는 더욱 깊어졌고 결국 그는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열강의 공동보장 하의 한국 중립화’를 추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종은 중립국 안을 가지고 일본 정부에 타진하도록 명했고 신임 공사 조병식을 일본으로 보냈다. 8월 25일 일본에 도착한 조병식은 나흘 뒤 아오키 외상을 방문해 중립국 안을 타진했다. 아오키는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을 노리고 있는 아오키로서는 크게 경계를 강화했을 것이다. 같은 날 8월 25일 조병식은 국민동맹회 결성을 위해 움직이고 있던 고노에 아쓰마로와도 만났지만, 고노에는 “중립국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보다 독립국 상태로 있으면서 일본과 비밀리에 공수동맹을 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 안에 든 쥐인 조선을 당연히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동맹회와 여섯 교수의 건의서

    러시아군이 평톈을 점령함으로써 바야흐로 전 만주가 러시아의 점령하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일본의 여론을 크게 자극했다. 러시아의 만주 출병에 대한 반발 움직임으로 고노에 아쓰마로 등은 1900(메이지33)년 9월 11일 ‘국민동맹회’를 결성했다. “지나를 보전하고 조선을 옹호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국권과 국익을 자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미 동아의 평화를 보전하고 전 세계 문명의 기운에 보탬이 되는 것이 우리 일본국민의 천직이라고 자각했다. 개국의 원대한 계획을 여기에 두었고 진취의 대계를 이것으로 정했다”라는 선언이 발표되었다. 고노에 등은 도미즈 히론도 등 여섯 명의 대학교수의 건의서를 가지고 9월 28일 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방문했다. 건의서엔 “…. 일본은 가장 많은 군대를 보냈고 최선의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일본의 주장이 중시되어야 할 터이다.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제국 웅비의 단초를 열 시기는 진정 오늘이다. 그런데도 겸양의 미덕이 지나치다. 외교당국자는 제국의 이해를 같이하는 나라와 서로 제휴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일에 힘을 다하기를 바란다”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 건의서를 접수한 야마가타는 거침없이 “일러 전쟁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를 결행할 수 없다. 다른 날 일본이 이를 결행할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 어떻게 일본은 정치인, 군인, 언론인, 교수, 국민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가!!>

    러시아 정부의 조선에 대한 방침과 고무라 공사

    1900년 가을이 되면서 의화단 궐기는 외국 군대에 의해서 진압되었고, 사태는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이제 그들의 시선은 조선에 집중하고 있다. 10월 20일, 러시아 재무상 비테와 일본 공사 고무라와의 회담에서 고무라의 ‘만한세역분할론’에 대해 비테는 “나의 소견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독립과 보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손상하는 일은 서로가 일절 피해야 한다. 러시아로서는 그 나라의 독립과 보전에 장해를 초래할 만한 성질의 협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라며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고무라는 당황해하면서 “내 사견의 취지는 결코 한국의 독립을 손상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 한국 및 만주에서 양국이 현재 보유하는 중대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행동의 자유를 얻고자 한다는 뜻이다”라고 변명했다. 비테는 거듭 “내 의견의 취지는 한국은 온전한 독립국으로서 그대로 놓아두자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회담은 끝났다. 비테는 고무라의 ‘만한세력영역분할론’에 대해서 한국의 독립을 어디까지나 존중해야 함을 강조했다. 바로 여기에 이후 전개되는 러일 다툼의 핵심이 있다. 아무튼, 당시에 고무라와 비테가 합의에 이르지 못함으로써 결국 이 두 사람은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계기, 그리고 그 이후 개최되는 강화회의에서 전권으로 다시 만나는 길을 닦아 놓았던 것이다.

    러시아 일본 공사 이즈볼스키의 한국 중립화 구상 추진

    이 사이에 이즈볼스키는 조선 문제로 일본 측과 접촉하며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1900년 11월 1일에는 가토 신임 외상과 회담했다. 12월 14일 이즈볼스키는 한국 중립화 안의 교섭 방법에 관해서 열강 공통의 보장에 의한 한국 중립화 계획으로는 일본의 동의를 얻기 어려우며, 오히려 일본과의 직접 협정으로 ‘러일의 이중통제 제도’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니시-로젠 협정의 제2조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된다. 12월 20일 이즈볼스키는 가토 외상과 회담했다. 이날은 일본이 “일본 신민 중에 혹자는 러시아가 한국에 대해서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의심한다”라며 자국의 주장을 강하게 내밀었다. 이즈볼스키는 “러시아가 한국에 야심이 없다는 점은 지난해에 스스로 자유의지를 발동해 한국에서 퇴각한 것이 그 증거다”라고 둘러댔다. 가토는 “자유의지로 퇴각했다고 말하지만 그때는 러시아가 뤼순과 다롄을 얻으려고 할 때였다. 라오둥 반도의 땅은 일청전역(청일 전쟁) 시에 일본이 먼저 이를 영유하려고 했는데, 러시아 등이 이를 동양평화에 유해하다고 하면서 이에 반대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입술의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러시아는 뤼순과 다롄을 취했다.”며 서로의 속내를 들춰냈다.

    가토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는 1898년 4월 25일의 의정서(니시-로젠 협정)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현재 상황에 잘 적용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이즈볼스키는 만주 문제까지 거론하며 회답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가토는 “만주 문제와 한국 중립화는 서로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소위 조선 중립론이란 것은 단지 일시적인 미봉책에 지나지 않으며, 러시아가 그 숙원을 실현할 여지를 보류할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고토(耕壽), 『인천전투』, 석판화, 1904, 화집 『러일전투화보』에 수록(출처 : 한길사 제공)

    반러시아론의 고조 및 러시아의 만주 중시론(전쟁의 공포)

    연초부터 러청 밀약 소문, 러시아와 청국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 교섭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어오자 일본의 국내여론은 한층 더 격양했다. 이에 국민동맹회는 대규모 캠페인을 개시했다. 또한, 1901년 2월에는 고쿠류카이(黑龍會)도 발족했다. 창립 취지문은 이렇다. ‘시베리아 및 만주, 그리고 조선이 오랜 세월 우리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또다시 논할 것도 없는바, 우리는 모두 다년간 흑룡강변에 노숙하고 장백산 아래 풍찬하면서 풍속과 인정을 시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이 단체는 급속히 공격적인 논조를 보이게 된다. 전투적인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일을 계기로 일본이 군사행동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를 간파한 비테는 6월 6일 람스도르프 외상에게 회답에서 “만주의 점령은 일본과의 결렬을 초래하든지 촉진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유일한 과제는 ‘일본과의 전쟁을 배제하는’ 일이다. 물론 만주포기론은 취할 수 없다. 우리는 동청철도의 남부지선도, 뤼순도, 다롄도 포기할 수 없으며 포기해서도 안 되지만, 이 이상 나아가서도 안 된다. 전쟁을 막는 최선의 방책은 동청철도를 민간회사의 사업으로 하고 만주에서 의리의 역할을 이 기업의 보호만으로 한정하는 일이며, 우리의 군정을 폐지하고 만주의 정치적 정복을 단념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비테는 일본이 조선을 요구한다면 조선의 독립을 국제적인 장으로 가져갈 것이며, 그래도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이것을 개전 사유로는 간주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가쓰라 내각의 성립

    일본에서는 사태가 결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901년 6월 2일 이토 히로부미가 마침내 수상직을 사임하고 가쓰라 타로가 총리대신이 되었다. 가쓰라는 1847년생으로 보신 전쟁(1868~1869) 시기 겨우 일개 사관으로 참가한 데 지나지 않았지만, 독일 유학, 육군성, 청일전쟁에 제3사단장, 타이완 총독, 육군대신 이어 총리대신에 취임한 것이었다. 이 내각의 출현과 함께 유신의 원훈들은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가쓰라가 외무대신에 앉히고 싶어 했던 인물이 주청 공사 고무라 주타로였다. 이 가쓰라와 고무라 같은 소장파 수상과 와상의 조합으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러시아관

    도쿄전문학교(1902년부터 와세다대학)의 출판부 역사총서 제1편으로 야마모토 리키오의 『러시아사』가 2월 하쿠분칸에서 출간, 이어서 역시 같은 도쿄전문학교 출판부에서 아나톨 르루아-볼리유의 『러시아제국』이 하야시 기로쿠의 번역으로 출간, ‘야누스’로서의 러시아라는 시각이 핵심 내용이다. 1902년에 나온 게무야마 센타로의 『근세무정부주의』에서 러시아는 혁명을 배태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독자를 이끌어 간다. 이 책은 고토쿠 슈스이 등 메이지의 사회주의자들도 자주 읽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1901년에 출간된 또 하나의 중요한 책, 우치다 료헤이의 『러시아 망국론』과 연결된다. 청일전쟁 후의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에서 와신상담이라는 슬로건이 내걸리고 러시아를 일본의 주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이 책은 발매금지되자 그해 11월에 『러시아론』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일부 수정해 고쿠류카이 본부에서 출간했다. 우치다는 이 책에서 러시아의 침략주의를 강조하고 러시아의 육해군을 분석,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던 시기, 일본이 러시아와의 개전론으로 끓어오르던 시기에 일본인 엘리트의 대러 인식은 러시아에 대한 공포감 또는 위협의식이 아니라, 러시아는 혁명 상태에 빠져 있었다. 러시아는 낙오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일동맹의 교섭과 영일동맹 조약의 조인

    일본 내에서는 유신 후 최초로 1900년에 외무대신이 된 가토 다카아키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찍부터 영일동맹을 제창했다. 7월 15일 주영 공사 하야시 다다스와 주일 공사 맥도널드(휴가차 본국 체재)와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란스다운 영국 외상은 “영국은 조선이 러시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영국과 일본의 목적이 일치하는 이상 상호방위의 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야시는 “조선에서는 중립의 보장은 무효다. 조선인은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줄 모르는 국민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를 방문한 이토는 12월 2일 람스도르프와, 12월 3일에는 비테와 회담했다. 아무튼 비테는 러시아는 조선을 점령할 필요는 없지만 귀국이 점령하는 것은 방관할 수 없다고 했다. 이토는 람스도르프의 요구에 응하여 12월 4일 귀국 전 자신이 생각하는 협정안을 문서로 작성하여 건넸다. 제1조 ‘조선의 독립의 상호 보장’(이하 생략)이다. 람스도르프는 이 내용을 보고, “이것은 합의의 기초가 아니라 일본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획득하기를 원하는 광범위한 특권리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11월 28일 일본 각의는 영국의 안에 대한 일본의 수정안을 결정했다. 다만 극히 일부 수정하는 데 그쳤다. 이토는 “일영동맹의 체결은 러시아와의 가장 중요한 협조가 가능할지 확실해질 때까지 천연 시키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결정적인 의견을 써 보냈다. 12월 7일 가쓰라의 자택에서 열린 원로회의에서는 고무라 외상이 저 유명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영일동맹을 옹호했다.

    고무라는 러시아와의 협정의 문제점으로서 “1. 동양의 평화를 유지해도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그칠 것. 2. 경제상의 이익이 적다는 점. 3. 청국인의 감정을 해하고, 그 결과 우리의 이익을 적지 않게 손상할 수 있다는 점. 4. 영국과 해군력의 평형을 보유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는 점”의 네 가지를 들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과 동맹하는 것의 이점으로는 “1. 동양의 평화를 비교적 항구히 유지할 수 있다는 점. 2. 열국의 비난을 받을 우려가 없고, 제국의 주의에 있어서도 일관된다는 점. 3. 청국에서 우리나라의 세력을 증진한다는 점. 4. 한국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점. 5. 재정상의 편익을 얻는다는 점. 6. 통상에 있어서의 이익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 7. 러시아와 해군력의 권형(權衡)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몇 차례의 대안을 거쳐 영일동맹 조약이 1902년 1월 30일에 조인되었다.

    러불선언과 러시아의 만주철군협정의 체결

    구리노 공사는 영일동맹의 조약 문안을 러시아 외상에게 보냈다. 람스두르프는 영일동맹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영일동맹이 러시아를 타깃으로 한 동맹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그래서 3월 19일 동맹국 프랑스와 함께 ‘영일동맹에 관한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만주 문제는 1901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다시 한번 교섭을 개시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러시아와 청국에 작동해 러시아 측에서 철군에 관한 조약안이 제출되어 있었다. 1902년 4월 8일 러시아와 청국은 마침내 만주철군협정을 체결했다. 영일동맹의 성립과 러.청 철군 조약의 조인은 일본의 반러주의자들에게 승리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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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장 새로운 노선의 등장

    제2차 해군대학 도상 훈련

    육군상과 달리 해군의 군인들은 극동에서의 전쟁, 즉 일본과의 전쟁을 직시하고 있다. 1903년 1월부터 3월에 걸쳐 니콜라이 해군대학교에서 해군장관 티르토프의 명령으로 제2차 러일전쟁 도상훈련을 실시했다. 평가단의 보고는 “러시아에서 선전포고를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전쟁의 원인은 단 하나, 일본이 품고 있는 조선을 영유하려는 야망이다”이었다. 1903년 1월 일본 주재 해군무관 루신은 일본이 취할 가능성이 있는 네 가지의 군사행동 계획에 관해서 뤼순의 알렉세예프에게 보고했다. “(1) 조선 북부로 출병하고 압록강과 평양 부근에 상륙. (2) 부산에 상륙해 서울로 진격. (3) 뤼순 부근에 상륙해 만주로 진격. (4) 조선을 점령하고 러시아군의 공격을 기다린다.”

    그리고 루신은 일본 해군의 인물(군령부장 이토 스케유키,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사쓰마 출신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베에)에 대해 “현대 일본 해군의 진정한 건설자다.”라고 평가를 했다. 한편 러시아는 1903년 3월 해군대신 티르토프 사망으로 군령부장 아벨란을, 군령부장엔 로제스트벤스키를 승진 임명했다.

    만주 철병과 일본과의 조선 문제 전략

    1903년에 들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움직임도 범상치 않아 이에 대한 대응도 절실해졌다. 장관들은 협의를 거듭했다. 우선 1월 24일 예비회의가 열렸다. 외상 람스도르프와 육군상 쿠로파트킨을 중심으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우선적으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만주 철병 약속은 지키지만, 청국에게서 보상을 얻어낸다. (2)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조선 문제를 놓고 대화하는 것은 좋지만, 종래 결정되어 있는 것의 보완이라는 형식에 머문다. 조선의 보전은 러시아 정책의 기초다. (3) 일본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만주 문제를 조선 문제와 동렬에 놓고 다를 수는 없으며, 일본이 러.청 관계에 간섭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만주에 대한 보상으로 조선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즉 만한교환론은 취하지 않는다. 조선에 대해서는 종전대로 독립존중의 방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상 람스도르프는 “조선은 장차 러시아의 국가적 이해에 불가피하게 그리고 극도로 중대한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고토(耕壽), 『평양 칠성문 격돌』 석판화, 1904, 『러일전투화보」에 수록(출처 : 한길사 제공)

    극동의 베조브라조프, 극동 정책의 신구상

    베조브라조프는 극동 문제에 관한 가장 예리한 분석가인 청국 주재 무관 보가크와의 만남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통해서 우수리 지방 및 아무르군관구와 연결함으로써 만주에서 우리가 놓인 전체적인 상황에 비춰보면, 조선 쪽에 강고한 최전선이 창출된다”고 했다. 즉 오른쪽 날개 뤼순과 왼쪽 날개 블라디보스토크 두 날개 사이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이었다. 베조브라조프는 “극동의 군사태세는 극도로 취약해서 일본의 공격을 초래하는 유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남만주에 육군 병력을 증강할 필요가 있다”라며, “일본인들과 상호 간 유익한 의견 교환을 순조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준비를 완료하고, 충분히 강력해지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러한 준비 없이는 대화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런 전략을 완성하기 위해서 베조브라조프의 요청으로 1903년 4월 8일 수도에서는 황제 임석 하에 극동 문제에 관한 특별협의회가 열렸다.

    무림암(無隣庵) 회의

    일본 국내에서는 러시아의 < 4월 8일 회의>에 대해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 대러 정책의 근본방침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합이 이루어졌다. 가쓰라 수상, 고무라 외상, 그리고 원로 이토, 야마가타 네 사람의 수뇌회담이었다. 교토에 있는 야마가타의 별장 무린암에서 회합했기 때문에 ‘무린암 회의’라고 부른다. 가쓰라와 고무라는 이미 ‘대러 일전의 각오를 마음속에 감추고’ 있었다고 본다. 일본의 요구를 주장하려고 하면 아무래도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일본은 조선을 위해서 만주에서 러시아와 다투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만한교환론은 허상이고 조선을 지배하는 자는 남만주를 지배해야 하며, 남만주를 지배하는 자는 조선의 지배를 노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고무라외교사』에도 “우리가 나라의 지위를 지탱함에 관해서는 백난(百難)을 극복하고 이에 임해야 하며, 조선은 여하한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결코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데에 서로 일치했다. 특히 고무라와 가쓰라는 이 시점을 기해서 시국의 앞길에 대해 확고불발의 결심을 굳혔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고무라는 러시아가 청국에 들이민 7개 항목의 요구에 관해서, 러시아 정부 내의 ‘평화당’이 ‘전쟁당’에 의해 배제된 것이라 보았다. 청국이 이를 거부한다면 러시아는 만주에 남을 것이며, 러시아의 항구적인 만주점령은 당연한 수순에 따라 동 국가의 항구적인 한국점령을 의미하며, 그것은 일본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 했다. 즉 러시아에의 굴복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다

    만주 문제에 대해서 『도쿄아사히신문』은 우선 4월 24일에 논평 없이 ‘러청밀약안’을 보도했고, 25일에는 논설 ‘러시아 철병하지 않다’를 실었다. “러시아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만주점령의 지속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강경한 정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도쿄아사히신문』은 비난의 칼끝을 압록강 문제에 겨누었다. 4월 30일 자 1면 머리기사는 ‘조선 특전(特電) 러시아군, 의주(義州) 진입’으로 30명의 러시아 병사들이 의주에 도착했다는 보도였다. 이 뉴스에 이어 5월 1일 자 ‘러시아군, 조선으로 들어가다’라는 제목의 사설은 “삼림회사 보호라는 목적으로 예정된 행동은 1896년의 각서는 물론 1898년의 협정도 위반하는 것이다. 제국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 대해 의주의 러시아군이 일러 협상의 조항에 위반한다는 점을 적절하게 비난하고, 동시에 그 철회를 요구해야 한다. 이것은 하루도 늦출 수 없다. 러시아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는 우리도 역시 별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5월 8일 자 사설 ‘러시아의 조선 침략’을 게재해, “우리가 판단하는 바로는 러시아는 마침내 일러 협상을 결렬시키고, 조선을 향해 감히 침략적 행동을 하려 한다. 우리 일본은 동맹국인 영국 정부와 협의해 이에 대한 조치를 서둘러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 10일 자 사설에서는 “제국(일본)이 극동의 평화를 위해 취해야 할 수단은 자명하다. 지금 제국이 엉뚱하게 고식적이고 구차한 정책을 농하다가 다른 날의 회한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각오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5월 29일에는 육해군과 외무성 ‘당국자’가 모이는 중요한 회합에서 “금일을 기해 일대 결심을 실행하고, 전투를 무릅쓰고 러시아의 횡포를 억제하지 않는다면 제국의 전도를 우려해야 할 것이다. 금일의 시기를 놓치면 앞으로 결코 국운 회복의 기운을 맞이할 수 없다”라고 했다.

    조선의 반응

    그사이에 조선에서는 러시아의 용암포 진출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는 의견이 대두하고 있었다. 『황성신문』은 5월 25일 자에 ‘서북 삼림 및 용암포 사건’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고 27일, 28일, 29일, 30일까지 네 차례 연재했다. 그 내용은 “지금 러시아인이 만주에 그 세력을 수립한 것이 우리에게 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세상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바다”였다. 그리고 6월 8일 자 사설은 ‘전국의 백성들에게 알린다’라는 제목 아래, 한국은 바야흐로 “누란의 위험”에 처해 있어 “무엇보다도 우려해야 할 상황이다”라고 썼다.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국의 일부를 잘라 내주더라도 만주의 개방은 아니 된다면서, 한국을 제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 생각하고 멋대로 분활하려 하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이 사설은 “우리 동포들은 부모의 나라가 장래에 이적(異賊)의 역(域)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라는 뜻이었다.

    참모본부와 일곱 박사

    바로 이때 일본의 참모본부는 대러 방침을 결정하려 하고 있었다. 6월 8일 오야마 이와오 참모총장은 대러 문제를 토론하는 참모본부 각 부장 회의를 소집했다. 러시아의 움직임은 “제국의 장래에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제국이 국력을 다해 그 존망을 걸고서라도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러시아에 대항하고 ‘만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를 위해서는 러시아인들을 만주 바깥으로 쫓아내고, 만주를 개방해 각국의 호시(互市)로 만들어…. 어느 나라도 독수를 뻗치지 못하도록 중립지대화 하고, 그리고 한국의 점령을 확실히 해 러시아인의 남하를 방해하고, 저들이 조차한 뤼순과 다롄을 반환하도록 하며, 또 해야 할 일은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우리가 점령해 러시아인들이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문을 막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라고 했다. 요컨대 만주를 중립화하고, 한국을 점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구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전쟁을 불사하는 강경한 외교 담판을 시도해 저들이 우리의 명령에 따르면 좋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일대 결전을 시도하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라며, 전쟁을 위해서는 지금 오늘이 가장 좋다는 4원칙을 제시했다. 이때 민간에서도 중요한 움직임이 있었다. 6월 1일에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도미즈 히론도 등 일곱 명의 박사는 가쓰라 수상을 방문해 [그들의 의견인 주전론]을 건의했다. ‘그들도 해 뜰 때 잃더라도 해 질 무렵에는 거둘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쿠로파트킨의 착각

    이럴 즈음 러시아 육군장관 일행(솔로구프 중장, 보카크 소장)의 일본 방문이 실현되었다. 그는 메이지 천황, 가쓰라 다로 수상, 데라우치 마사다케 육군상 등과 면담 결과, 호의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는 일본에게는 대전쟁을 치를 자금이 없다고 확신했지만 속고 있는 것이었다. 기만전술에 빠진 것도 모르고…. 일본군에 대한 쿠로파트킨의 평가는 기본적으로 일본군의 힘을 얕잡아 보는 것이었다. 6월 17일 쿠로파트킨은 교토에서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전보를 치면서, 일본 요로의 사람들과 회담에서 자신이 얻은 결론을 다음과 같이 썼다. “만주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일본과의 충돌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우리가 조선에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이 권리들의 적극적 행사를 삼가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쿠로파트킨의 상황판단은 완전히 일본의 태도에 현혹된 것이었다.

    일본, 대러 방침을 결정하다

    쿠로파트킨이 도쿄에서 일정을 마치고 교토 방면으로 떠난 뒤, 일본 정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참모본부와 함께 대러 정책의 결정을 단행했다. 6월 23일 어전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서 러일전쟁 호기론(好機論)은 참모본부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다만 이 의견서는 조선 문제의 해결을 논하면서 그를 위한 교섭 개시를 주장했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전쟁으로 해결한다는 논리를 담고 있었다. 이날 고무라가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반드시 얻어내야 한다고 한 구체적인 내용은 네 가지였다. (1) 청·한 양국의 독립, 영토보전 및 상공업 상의 기회균등주의를 유지할 것. (2) 일본은 한국의 내정개혁을 위해서 조언(협박) 및 조력을 할 수 있는 전권(專權)을 보유할 것. 등이었다. 조선에 관해서는 러·일 사이에 1896년의 야마가타-로마노프 협정, 1898년의 니시-로젠 의정서가 존재했다. 요컨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점을 러시아가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외교교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에 호소해서라도 기필코 이를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전회의에서는 어떠한 이론(異論)도 제기되지 않은 채 외상의 제안이 결정되었다. 그 후 각의에서도 추인을 받았고,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되었다. 바로 눈앞에 러시아 육군상이 와 있었고 또 그와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전론의 현실화가 된 것이다.

    황제 니콜라이의 새로운 방침과 뤼순회의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니콜라이 2세와 아바자는 일본에 대한 유화적인 방침을 세우며 일본의 조선 영유를 인정하자는 말까지 나왔고, 일본과의 충돌 위험성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뤼순에 도착한 베조브라조프는 알렉세예프, 쿠로파트킨, 보카크, 주한 공사 파블로프, 주청 공사 레사르, 등과 연쇄 회동을 7월 4일부터 7월 11일까지 10차에 걸쳐 회의를 진행하고, 황제에게 전보를 보냈다. 핵심은 조선에 관해서는 “일본이 남부를 점령한다면 대항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 전체를 차지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일본과의 전쟁은 회피한다.”였다.

    이렇게 연일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 황제는 만사태평이었다. 7월 27일 수도로 귀환한 베조브라조프와 보가크는 아바자와 함께 황제를 만나 뤼순회의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황제는 여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황제는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사로프의 성인 세라핌의 열성식 행사가 다가와 있었다. 다시 수도로 돌아온 것은 8월 3일이었다. 황제의 무관심, 부하 베조브라조프의 비관적 시각과 쿠로파트킨의 낙관적 시각으로 인한 의견 충돌은 일치된 합의를 도출할 수가 없었다. 또한, 황제와 베조브라조프가 정해둔 유일한 태수 후보자 알렉세예프 해군대장은 끝까지 극동태수제 자리를 고사했다. 8월 12일 극동태수제 설치령이 반포되었다. 8월 18일에 가서야 알렉세예프는 비로소 황제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한마디로 난맥상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에서 고조되는 개전론

    일본에서는 신문들이 앞다퉈서 개전론으로 전환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7월 최대의 사건은 구로이와 루이코의 『요로즈초호』가 7월 29일 자에서 ‘러시아에 경고해야 한다’라는 논설을 게재한 일이었다. 이것이 이 신문에 실린 최초의 개전론이었다. 『도쿄아사히신문』은 이미 주전론 쪽에서 있었는데, 7월 31일 자에 한층 더 준엄한 논설 ‘일러 개전에 풍평(風評)’을 실었다. 대외강경파는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7월 23일 연합위원회가 개최되었고, 대외강경파 동지대회는 8월 9일 오후 1시부터 간다 긴키칸에서 개최되었다. 우선 선언서를 채택하였고, 선언서에는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대해 인내한 것이 다섯 번에 이른다”라면서 이를 쭉 열거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하루빨리 최후의 결단을 내려, 만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와신상담한 지 이미 오래며, 군비 확장 역시 이미 이룩했다. 우리는 이에 소신을 밝혀 말하고, 우리 정부의 결심을 촉구하고자 한다.”라고 했다.

    다음 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