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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한강과 만난 ‘텍스트힙’

독서 문화가 부활할 수 있을까

침몰해가던 국내 출판계와 서점가가 부활의 날갯짓을 한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텍스트힙’ 열풍 덕분이다. 텍스트힙이란 글자(text)와 세련됐다는 뜻의 영단어 힙(hip)의 합성어다. 말 그대로 글을 읽는 행위 자체에서 ‘멋짐’을 느끼는 것이다. 최근 들어 국내 1020세대를 중심으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 추세다. 여기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호재가 더해졌다. 30대부터 60대까지 다른 성인 세대도 ‘책 읽기’ 열풍에 동참했다. 서점·출판 업계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독서 문화 부활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글.반진욱 기자(매경이코노미)

닷새 만에 100만 부, ‘한강’효과 텍스트힙 열풍 힘입어 연말까지 롱런

텍스트힙 현상은 영국, 미국의 10대 사이에서 처음 시작되어 올해 초 국내에 상륙했다.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인식이 강했던 독서는 요즘에는 ‘남과 다른 나만의 독특한 취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020세대를 중심으로 문학 작품을 찾는 이가 증가했다.

실제로 올해 6월 열렸던 서울국제도서전은 텍스트힙 현상이 두드러진 행사였다. 도서전에는 15만 명이라는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도서전을 찾은 총관람객 수(13만 명)보다 약 15% 증가했다. 대다수는 2030 젊은 세대다. 20대(45%)와 30대(28%) 관람객 비중이 전체 73%에 달했다. SNS에는 도서전을 여러 차례 찾아왔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N차 방문 인증샷’이나 출판사 전시에서 받은 도서전 굿즈와 함께 찍어 올린 사진이 넘쳐났다.

특히 ‘시(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6월까지 전체 시집 판매 중 20대가 26.5%, 30대가 20.2%로 많다. 예스24는 10대 독자에게 팔린 시집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124.1% 증가했다고 밝혔다. 알라딘에서도 2030 여성이 시집에 보이는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8월 현재 알라딘 시 분야 베스트셀러 1위인 안희연의 ‘당근밭 걷기’는 전체 구매자의 48%가 2030 여성이다. 1999년생 시인 차도하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미래의 손’ 역시 2030 여성이 전체 49.5%를 구매했다. 박하나 예스24 마케팅본부장은 “굳이 따지면 시는 ‘숏폼’이다. 숏폼에 익숙한 10대에게 시의 짧고 감각적인 언어가 색다른 감성으로 와닿으면서 인기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텍스트힙 열기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수상 결과가 나온 10월 10일 직후 대형 서점 사이트가 마비된 데 이어 반나절 만에 한강 작가 서적 13만 부가 넘게 판매됐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30만 부가 팔렸다. 주말(10월 12~13일)을 지나면서 더욱 속도가 붙기 시작해 14일에는 80만 부를 돌파했고, 15일에는 97만 부, 16일에는 100만 부를 돌파했다.

출간이나 수상 후 이처럼 빠른 속도로 판매량이 증가한 건 출판계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은 베스트셀러 ‘1Q84’가 출간 두 달여 만에 60만 부를 돌파하면서 파죽지세의 기세를 이어간 적이 있지만, 100만 부를 돌파하기까지는 8개월이 걸렸다. 올해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세이노의 가르침’도 100만 부를 판매하는 데 1년 4개월이 걸렸다. 신간도 아닌 구작이, 그것도 단종이 아니라 작가 전체 작품이 고르게 팔려 나가며 엿새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노벨문학상’ 특수 속에 각 서점은 사이트에 한강 노벨상 수상 관련 특별 코너를 만들어 홍보하고 나섰다. 교보문고는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코너를 마련해 그의 전작들을 소개하고 있다. 예스24도 ‘한강, 2024 노벨문학상 수상’ 코너를 통해 작가의 이전 인터뷰 내용과 노벨문학상 선정 심사평 등을 소개했다.

여기에 더해 다른 문학 작품 등을 찾는 수요도 덩달아 커진 것으로 분석된다. 예스24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이후 16일까지 7일간 한강 저서를 제외한 소설·시·희곡 분야 판매량이 전년 대비 49.3% 증가했다고 밝혔다.

예스24 관계자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한국 문학과 독서 행위의 중요성을 다시금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독자들의 관심은 올해 말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인프라 구축 없이 힘든 장기흥행, 독서에 대한 꾸준한 관심 이끌어야···

축제 분위기가 연일 이어지고 있지만, 출판업계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다. 현재의 호황이 ‘반짝 특수’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노벨상 열풍’에 가려진 출판·서점가 현실은 암울하다.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는 2년 연속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인쇄소는 누적된 손해를 버티지 못하고 파산하는 곳이 적잖다. 독서 인구 감소로 출판업계는 2018년부터 몰락 수순을 걸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한 ‘한국 출판생산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인 2019년(9,979만 부)부터 매년 신간 생산 부수가 떨어지는 추세다. 2020년에 8,165만 부, 2021년 7,995만 부, 2022년 7,291만 부를 찍은 데 이어 지난해에는 7,021만 부를 생산하는 데 그쳤다. 출판사 역시 사정이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국내 주요 71개 출판사의 2023년도 총영업이익은 약 1,136억 원으로, 2022년(약 1,973억 원) 대비 42.4%(약 837억 원) 감소했다. 71곳 중에서 19곳은 영업적자를 냈다. 최근 2년간 영업이익이 감소한 기업은 45곳에 달했다. 서점가 역시 상황이 좋지 않다. 규모가 영세한 지역·독립서점은 적자를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곳이 부지기수다. 출판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특수를 ‘장기 흥행’으로 바꾸기 위해 마케팅 활성화, 출판 인프라 복구 등 정책이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출판사 대표는 “산업이 전반적으로 활력이 떨어진 상태다. 신생 출판사는 3년 이내 자리 잡지 못하면 문을 닫는 게 현실이다. 단순히 책 내용만 좋으면 팔리던 시대는 끝났다. 매력적인 저자 발굴, 책의 ‘굿즈’화 등 노력을 기울이는 곳들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