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임세환 감정평가사(가온감정평가법인 본사)
겨울아이
방영
2001년 12월 7일
<MBC 베스트극장>
기획
정운현
극본
강은주
연출
고동선
주연
이상아, 남능미, 김형자, 최성
2001년 12월, 감정평가사 1차 시험에 합격하고 서대문도서관에서 2차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1년 넘게 감정평가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 감정평가사의 업무는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의사, 약사, 변호사는
현실과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으나 감정평가사의 모습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해 겨울, 감정평가사 부부가 주인공인 단편 드라마가 MBC에서 방송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수험생들은 말로만 듣던 감정평가사의 업무와 일상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설레었습니다. 당시 배우 이상아의 인기는 다소 시들했습니다만 ‘감정평가사 유진’ 역할로 나온다니 기대되었습니다.
50여 분의 드라마에서 감정평가사의 현장조사, 사무실 분위기 등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상황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주인공의 직업은 그저 거들기만
하였습니다. 아쉬움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도 어렴풋이 현장조사와 감정평가법인의 분위기가 스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넘은 오늘, 영상을 다시 천천히 보니 과거와 오늘을 돌아보게 됩니다.
S#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세요? 경매감정인이에요.
외벽은 몰탈페인팅 마감, 창호는 목재단창···.
안녕하세요. 전 경매감정인입니다. 보증금은 얼마에 사세요?
이 집 경매 들어간 건 아시죠? 절차 밟는 건 한두 달가량 걸리고요.
아무튼 잠깐 둘러볼게요.
(집주인과 실랑이를 하며) 난 이 집을 감정하러 온 사람이야! 못 나간다.
이 집 둘러봐야 해. 그게 내 일이야!
- 감정평가사 유진(이상아)의 극 중 대사
유진이 현장에 도착해 제일 먼저 챙긴 것은 ‘캐논 카메라’였습니다.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을 이용해 사진 촬영을 하지만 20년 전에는 카메라로 촬영하고 인화해 감정평가서에 붙여 제출했습니다. 사진 인화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요. 빛 노출 등의 이유로 인화된 사진이 잘못된 경우에는 다시 촬영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캐논 카메라를 메고 있는 2001년의 유진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2003년 감정평가사 시험에 합격하고 2004년 한국감정원(현재 한국부동산원)에서 수습 받았을 때는 디지털카메라가 대부분 보급되어 사진 인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현장에서 대상 사진이 잘 찍혔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서 재차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디지털카메라도 사라지고,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건물의 내외부를 점검합니다. 외벽, 내벽, 바닥, 천장, 창호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물건 단위별로 조사하는데요. 드라마 속 감정평가사 유진이 “외벽은 몰탈페인팅, 창호는 목재단창···.”이라고 중얼거린
이유였습니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 방, 화장실, 부엌 및 거실 등의 배치도를 그립니다. 건축물 현황도면에 있는 도면과 실제 내부가 일치하는지 확인합니다. 드라마상의 건물처럼 구옥인 경우에는 도면이 없을 때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감정평가사가 그린 배치도를 감정평가서에 첨부합니다. 또한 경매 감정평가에서는 이해관계인의 비협조, 폐문부재 등으로 내부 확인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내부 확인 불가의 사유를 감정평가서에
기재하고 생략하기도 합니다.
S#
저 법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요. 나간 김에 낙원상가 건 다시 한 번 체크해 봐요···.
주변 상황 변한 거 너무 고려 안 하고 좀 약하게 감정됐던데.
네.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대동상가 건은 말이에요···.
- 감정평가법인에서의 극 중 대화
법원에는 어떤 일로 가는 걸까요? 소송 감정평가인 경우 감정기일에 법원에 출석해서 감정인 선서를 합니다. “양심에 따라 성실히 감정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허위감정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선서하고 선서서를
재판부에 제출하는 것이죠. 저도 2010년 서울행정법원, 2023년 서울고등법원의 법원 감정인으로 선서했습니다.
또 과거에는 등기사항전부증명서를 발급하기 위해서 매번 법원에 갔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굳이 법원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다 발급받을 수 있으니까요.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감정평가법인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부동산 가격에 대한 토의와 토론이 끊이지 않습니다. 가격정보데이터가 구축되어 있지만 정보데이터는 과거의 자료거든요. 부동산의 가치는 현재가치이기에 주변 상황이 변동하므로, 지금
가격에 미치는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의 가격정보 수집이 필수적입니다. 지금 같은 부동산 가격하락 시기에 과거 정보로만 감정평가할 경우 고가 감정평가를, 2020~2021년 같은 부동산 가격상승의 시기에
과거 정보로만 검토한다면 저가 감정평가의 우려가 상시 존재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현재의 가격을 확정해 감정평가서를 제출하기 위해서는 현장가격정보 수집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지금 보니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보다도 순간순간 지나가는 감정평가법인의 풍경이 눈에 더 들어옵니다. 당시 P감정평가법인에서 촬영 장소를 제공했다고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사무실의 배치, 출장현황판 등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근데 정말 눈에 띄는 건 컴퓨터 모니터였습니다. 지금은 화면상의 모니터 같은 모델은 구경도 할 수 없으니까요. 20년 동안 기술의 발달은 감정평가 현장에서의 부대 업무를 많이 간소화하고
편리하게 만들었습니다.
허나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건 가격전문가로서 현장조사, 가격정보 수집, 토론과 토의, 적정가격 도출입니다. 아마도 이건 또다시 2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감정평가사의 존재 이유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