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꼭 한 번 가야만 하는 도시가 있다. 나에게는 시애틀이다. 이유는 미국 록밴드 너바나(Nirvana)의 고향이라는 것. 펑크는 다소 즐겁고 메탈은 너무 강하고 브리티시록은 너무 서정적이라 멀게 느껴졌던 내게 너바나의 노래는 퍼즐의 반쪽처럼 느껴졌다.

쓰리 코드 기반의 단순하고 역동적인 코드 진행 때문이었을까. 절규하는 듯한 보컬 커트 코베인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자아 성찰적 가사 때문이었을까. 후줄근한 패션이 편안하게 느껴져서였을까. 아니면 방송국에서 립싱크와 핸드싱크를 요구하자 의도적으로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반항심에 이끌렸을까. 아무튼, 시애틀에 가야 할 이유는 너바나로 충분했다.

2019년 가을, 시애틀 호텔에 짐을 풀고 곧바로 찾아간 곳은 파라마운트 극장이었다. 파라마운트 극장은 너바나가 두 번째 정규음반 ‘네버마인드’를 발매하고 약 5주 뒤인 1991년 10월 31일, 미국 북서부 투어의 마지막 공연장이다. 이 공연은 네버마인드 발매 20주년을 기념해 2011년 DVD와 블루레이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파라마운트 극장의 ‘파라마운트’는 스위스 마터호른 봉우리를 로고로 쓰는 영화사 파라마운트에서 따온 이름이다.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1928년 이 극장을 영화관과 보드빌(Vaudeville, 버라이어티 쇼 형태의 연극)의 겸용 극장으로 지어 이렇게 이름 붙었다. 시애틀타임즈는 극장 개관을 앞두고 이처럼 광고했다고 한다.

‘이렇게 웅장하고 경건한 극장이 대중에게 선보여진 적이 없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비교 불가능한 예술! 화려한 궁전 안에 있는 1에이커(약 1,224평) 규모 좌석. 모든 워싱턴주 주민들이 파라마운트의 위엄과 웅장함, 화려한 장식, 넓은 로비, 넓은 통로, 넓은 좌석, 빛의 심포니를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엄청난 공연을 보러 오세요! 전 세계에 이런 곳은 없습니다.’

파라마운트 극장은 스페이스 니들을 비롯해 최근에 지어진 시애틀의 여러 마천루 때문에 외관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내부만큼은 여전히 화려하다. 호화로운 로비 장식과 공연장 한가운데 달린 샹들리에, 고급스러운 벨벳 커튼은 홍대 롤링홀보다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극장이 이렇게 화려하게 지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1920년대 미국 주요 사교모임 장소가 영화관이었고, 1929년 대공황 발발 직전 이른바 ‘광란의 20년대’에는 특히 극장별로 관객 유치전이 치열해지며 더 크고 더 화려한 극장을 건설하는 경쟁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대공황 직전 미국의 화려함이 그대로 녹아든 장소라 할 수 있다. 물론 ‘락덕(락음악 덕후)’들에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너바나를 비롯해 1971년 핑크플로이드, 1978년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1989년 닐 영 등이 공연한 장소라는 점.

지난해 가을 막바지인 11월 말, 파라마운트 극장 무대에 오른 록밴드는 슬리터 키니(Sleater-Kinney)와 킹다이아몬드(King Diamond)였다. 슬리터 키니는 1994년 결성된 보컬, 드럼, 기타 구성의 3인조 미국 여성 펑크 록밴드다. 킹다이아몬드는 덴마크 헤비메탈 가수인 킹다이아몬드가 자신의 이름을 따 1985년 결성한 밴드다. 양일 모두 현지인들이 극장을 가득 채웠는데 공연장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슬리터 키니의 공연장은 시애틀 도심을 오가던 시민들이 저녁 식사 후 가볍게 들른 분위기라면, 킹다이아몬드의 공연장은 장발 남성과 가죽 재킷, 화려한 장신구 등 이른바 ‘헤비메탈 룩’을 갖춰온 팬들로 가득했다. 이 많은 헤비메탈 덕후들은 어디서 왔을까. 무대 위로 여성의 속옷이 날아들기도, 술에 취했는지 마리화나에 취했는지 모를 남성(시애틀은 마리화나가 합법이다)이 비틀비틀 춤을 추기도 했다. 고급 오페라 극장 같은 곳에서 열리는 헤비메탈 공연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데, 록 음악이 반세기 동안 미국 주류 문화였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시애틀은 너바나뿐 아니라 지미 핸드릭스나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 펄 잼(Pearl Jam), 사운드가든(Soundgarden) 등 다수 록밴드가 활동한 곳이다. 만약 시애틀을 찾았을 때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콘서트가 열리지 않는다면 인근 무어 극장의 공연 스케줄도 살펴보자. 무어 극장은 파라마운트 극장보다 이른 1907년 지어졌다. 시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었다. 이곳에서 앨리스 인 체인스는 1990년 1집 페이스리프트(Facelift)로 공연했고, 펄 잼은 1992년 이 극장에서 공연한 뒤 공연실황 영상을 ‘이븐 플로’ 뮤직비디오에 담았다.

크로커다일 카페 역시 시애틀을 찾은 락덕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시애틀 그런지록’의 고향 같은 곳이다. R.E.M. 기타리스트 피터 벅의 전 부인인 스테파니 도건이 1991년 오픈했다. 너바나와 펄 잼, R.E.M., 그린데이, 칩 트릭(Cheap Trick), 머드허니(Mudhoney) 등이 이곳에서 공연을 열었다. 2007년 12월 재정 문제로 문을 닫았지만, 2009년 3월 앨리스 인 체인스의 드러머 션 키니가 재개장했다. 가게 간판은 ‘크로커다일 카페’에서 ‘더 크로커다일’로 바꿨다. 롤링스톤지는 이곳을 미국 최고 클럽 톱7으로, 영국 가디언지는 시애틀의 10대 라이브 음악 공연장으로 선정했다. AP통신은 “전국 그런지록 순례자들의 목적지”, 워싱턴포스트는 “그런지록의 CBGB(맨해튼에 위치한 유명 클럽)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여러모로 시애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낮에는 무얼 할까. 먼저 커트 코베인의 자취부터 밟아 보자. 시애틀 도심에서 대중교통으로 약 30분 이동하면 커트 코베인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바로 직전 살았던 동네에 도착한다. 비레타 공원 근처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과 생전 부인 코트니 러브는 1994년 1월 비레타 공원 인근의 한 주택을 149만 달러(약 17억 원)에 매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커트 코베인의 출생지는 시애틀에서 차량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애버딘이라는 도시다. 유년기 유복하지 못하게 자란 그가 ‘네버마인드’ 이후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거금을 들여 산 집인데, 그로부터 석 달 뒤인 같은 해 4월 커트 코베인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코트니 러브는 3년 뒤인 1997년 이 주택을 290만 달러(약 33억 원)에 은행에 매각했다. 2000년 한 소유주가 은행으로부터 집을 인수했고, 지난해 9월에는 한 미국 공인 중개 에이전트가 이 주택을 750만 달러(약 85억 원)에 매물로 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아무튼 커트 코베인의 생전 마지막 주택이라는 점에서 매년 수많은 팬이 비레타 공원으로 모인다. 그의 유해가 고향 애버딘의 위시카 강변에 뿌려졌기에 이 공원이 그의 묘지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찾은 비레타 공원에도 추모하는 꽃다발이나 편지, 짧은 추모글이 가득했다. ‘R.I.P.(Rest In Peace)’라며 명복을 비는 글이나 ‘Come as you are(네 모습 그대로 와)’, ‘Easily Amused(쉽게 즐거워하는)’ 등과 같은 노랫말이 곳곳에 적혀 있었다.

시애틀 도심에선 팝 컬쳐 박물관 ‘MoPOP(Museum of Pop Culture)’도 가볼 만하다. 이전에는 EMP(Experience Music Project) 박물관으로 불리던 이곳은 시애틀 대표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이자 지미 헨드릭스의 광팬인 폴 앨런이 세운 곳이다. 건물 외관부터 일렉트릭 기타 모양이어서 친근한 느낌을 준다. 너바나나 지미 헨드릭스, 펄 잼 등 시애틀과 인연이 있는 록밴드들의 소장품이 풍부하게 전시돼 있다.

시애틀 곳곳에는 지미 헨드릭스의 흔적도 있다. 사실 지미 헨드릭스가 인기를 얻은 곳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미서부 시애틀 보이(West Coast Seattle boy)’라고 칭했다. 27년의 인생을 살고 1970년 묻힌 곳 역시 고향인 시애틀이었다. 도심에서 남쪽으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지미 헨드릭스의 무덤에도 매년 수많은 팬이 찾아온다. 시애틀 도심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작은 동상이 1997년에 세워졌다.